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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질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얼마 전에 볼일이 있어서 한 잡지 편집자를 만났다. 일이 끝난 후 둘이서 술을 마시며 세상 얘기를 하자니 자연스레 화제가 문구 얘기로 옮겨갔다.
문구 얘기는 나도 퍽 좋아하는지라 볼펜은 어느 게 좋다는 둥, 지우개는 어느 게 최고라는 등 술집에 앉아 두서없는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상대가 '그런데 무라카미 씨는 평소에 어떤 연필을 사용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늘 F심 연필을 사용하니까 "F를 쓰는데요"라고 대답하자,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늘 생각하는 건데, F심 연필은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 같지 않습니까?"
술자리에서였으니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사물을 느끼는 방법도 참 여러 가지입니다"하는 정도로 웃으며 마무리짓고 곧 다른 화제로 넘어갔는데, 어쩐 일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얘기가 점점 마음에 걸렸다.
왜 하필이면 F심 연필이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인가 하는 의문이 들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영문을 알 수 없이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리하여 어느세 F심 연필이 완전히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이런 경우는 무척 난감하다. 최근에는 F심 연필을 손에 쥘 때마다 그만 세일러복 차림의 여학생을 떠올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체가 한번 어떤 이미지를 창출하면 그뒤에는 거꾸로 그 이미지가 물체를 규정지어버린다는 현상이겠으나, 어찌됐든 내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피해를 주는 현상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모음집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최근에 본 책 중에 가장 인상깊었다. 이 책은 짧은 에세이 50개로 구성되어있다.
그중 한개의 일화 어떤 잡지 편지사와 술집에서 나눈 얘기를 시작으로 에세이를 작성한다. 사소한 것에서 주제로 넘어오기까지 아주 매끄럽다. 그의 조금은 난해한 소설과 달리 에세이는 정말 깔끔하다. 작은 것에서 시작해서 중요한 것을 끄집어 내는 상상력 그것을 뒷바침하는 작문 실력이 나타나 아주 이상적인 글이 아닌가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실 완전히 재능 파라고 생각했다. 글을 쓰면 그냥 잘써지는 사람. 그런 사람인줄만 알았다. 이 책을 보고 이게 글쓰기의 기본기인가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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