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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
되뇌기
나는 몸이 많이 피곤하거나 심적으로 머쓱한 일이 생기면 그 사람 이름을 육성으로 되뇌는 버릇이 있다. 무의식중 계속해서 되뇌기를 시도한 그 이름은 내 해마 속에서 엄청난 밀도로 중첩되어 있을 것이다. 만약 장기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이름을 지워버릴 수 있는 방법이 핀셋으로 한 장 한 장 떼어내는 것뿐이라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공상이 많은 INTP인 나는 투명한 스티커에 아로새겨져 겹겹이 차곡차곡 붙어 있는 그 이름을 핀셋으로 조심스레 떼어내는 상상을 한다.
한 장씩 떼어내며, OO 잘 가.
심신이 힘들 때마다 주머니에서 꺼내는 옐로우카드나 베개 속 부적처럼 그 이름이 쓰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아직도 그 사람을 생각하지만 그건 사랑해서가 아니다. 그리워서도 아니다. 애틋한 마음도 이제는 없다.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어떠한 것에도 동요하지 않고, 감정이란 것들을 다 써버리고서도 더 이상 충전하지 않는, 그냥 있는 마음이다. 신남과 설렘이라는 것이 1도 남아 있지 않은 점선 같은 감정이다.
영화 her에서 테오도르가 사만다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난 앞으로 내가 느낄 감정을 벌써 다 경험해버린 게 아닐까.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앞으로는 쭉 새로운 느낌은 하나도 없게 되는 건 아닐까."
나는 이 영화를 보다가 이 대사가 나오자 울었었다. 마치 십 년 뒤 내 감정을 안다는 듯이.
나는 이제 내 마음을, 내 감정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충전해 보고 싶다. 좋아하는 스타일의 새로운 음악을 듣게 되면 작은 몸짓으로 흥을 돋우고, 4월의 흩날리는 연분홍 꽃잎을 보며 작게 감탄하고, 더 나은 내가 되고자 자그마한 노력들을 계속하며 내 어깨를 마주 안고 싶다.
요즘 글을 쓰면서 그간 떠올리지 않았던 그 사람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하게 귓전에 울려서 당황스럽다.
내 인생 가장 힘들 때 누군가 보내준 듯이 홀연히 나에게 와서 존재만으로 힘이 되어주었던 사람. 다시 오지 않을 사랑. 하지만 이제 그 이름을 그만 불러야 한다.
나는 수면내시경을 받고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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