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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질

할머니는 죽기 전에 내 손을 잡아당겨 가슴 위에 올려놓으셨어. 그러곤 누구냐고 물었지. 나는 얼떨결에 자원이예요, 라고 대답했는데 할머니는 내 대답을 듣지 못했던 것 같아. 할머니와는 그게 마지막이었어. 나는 할머니의 옷섶을 헤치고 젖꼭지를 눌렀어. 누구세요 해야지, 얼른. 아무리 벨을 눌러도 문 저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할머니는 이미 다른 세상으로 가버렸으니까. 세상을 향한 내 유일한 문이 굳게 닫히는 순간이었어. 문 저편엔 더 이상 아무도 살지 않았어. 나는 한참 동안 빈집에 대고 초인종을 누르고 앉았었어. 고추 멍석 위에 있어서인지 자꾸 눈물이 났어. 눈알이 빠질 것처럼 화끈거리고 매웠어. 그게 내가 처음 대면한 죽음이야. 맵고 따갑고 어이없는. 그리고 할머니가 다른 세상으로 건너갔듯 또한 다른 문을 열고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야 했어.

천운영, 소설집 《명랑》: <세번째 유방>, 문학과지성사, 2004, 136-137쪽.

천운영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특유의 치밀하고 세심함 때문이다. 첫 번째 소설 <바늘>도 정말 좋아하고, 소설집 《명랑》에 실린 <명랑>과 그 외의 다른 글들도 모두 좋아한다.

'죽음'을 어린아이, 어른의 두 시선으로 모두 표현하는 데에 한 문단밖에 필요하지 않다니 놀랍다. 게다가 철학적 사유를 강조하거나 감정을 확대해서 서술한 것이 아닌데도, '죽음'을 이토록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니. 천운영의 글은 항상 감탄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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