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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2
그 사람은 가늘게 생긴 담배를 피웠다. 나는 그 모습을 항상 바라보았다. 그 사람에게서 나던 박하향이 나, 나는 고개를 든다. 그 사람과 함께 사라진 나의 후각이 돌아오고 있다. 꿈에서 뱉어버린 연기와 함께 진짜 그가 사라지려 한다. 그가 꿈에서 주었던 반짝이는 오백 원짜리 동전과 아이스크림과 기다리라는 말이 연기와 함께 사라진다. 나는 이 년 동안 흘리지 못한 눈물을 이제서야 흘리려 한다.
울고 싶지 않다.
우리는 단체로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설레면서도 불안하다.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 두리번거리다 말고 나는 고개를 숙인다. 어딘가에 도착하자 모두들 서둘러 내리기 시작한다. 나도 휩쓸려 내리려고 버스 문쪽으로 나간다. 문 앞에 그가 서있다. 그가 갑자기 손을 내민다. 너무나도 반짝여서 보석 같은 느낌을 주는 500원짜리 동전들을 나에게 수북이 내민다. 아이스크림 사드세요. 나는 너무나도 고맙고 기쁘다.
나는 그 사람의 생일파티에 가고 있다. 하지만 그의 집을 모른다. 앞서가는 여자를 뒤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 사람의 집으로 가고 있다. 저 여자가 그 사람의 집을 알고 있는 것일까. 어느 문 앞에서 여자가 벨을 누르자 그가 나온다. 그는 여자 뒤 나를 보고 놀란 눈치다. 초대받은 여자를 친절히 집안으로 들여보내고 그 사람은 두 손으로 나의 손을 잡는다.
_오늘은 아니야. 다음에 응?
그가 단호하고 정확한 목소리로 말을 하자, 나는 말이 삼켜지듯 나왔다.
_나 먼 곳에서 왔어. 오늘 아니면 언제? 언제?
그는 대답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의 손이 다정하고 따뜻하다. 나는 초대받지도 못하고 내쳐지면서 안도한다.
담배를 피웠다. 담배연기를 내 폐 속 깊이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하다 새로운 담배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켜 불을 붙이려는 순간 큰 불길이 터져 나와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사르르 다 타버렸다. 디즈니 만화 속 담배처럼.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 행동을 세번 반복하고 깨어났다.
나는 몸이 많이 피곤하거나 심적으로 머쓱한 일이 생기면 그 사람 이름을 육성으로 되뇌는 버릇이 있다. 무의식중 계속해서 되뇌기를 시도한 그 이름은 내 해마 속에서 엄청난 밀도로 중첩되어 있을 것이다. 만약 장기기억 속에 저장 되어있는 이름을 지워버릴 수 있는 방법이 핀셋으로 한 장 한 장 떼어내는 것뿐이라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공상이 많은 intp인 나는 투명한 스티커에 아로새겨져 겹겹이 차곡차곡 붙어 있는 그 이름을 핀셋으로 조심스레 떼어내는 상상을 한다.
한장씩 떼어내며, OO 잘 가~
심신이 힘들 때마다 주머니에서 꺼내는 옐로우카드나 베개 속 부적처럼 그 이름이 쓰인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아직도 그 사람을 생각하지만 그건 사랑해서가 아니다. 그리워서도 아니다. 애틋한 마음도 이제는 없다.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어떠한 것에도 동요하지 않고, 감정이란 것들을 다 써버리고 서도 더 이상 충전하지 않는, 그냥 있는 마음이다. 신남과 설렘이라는 것이 1도 남아있지 않은 점선 같은 감정이다.
영화 her에서 테오도르가 사만다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난 앞으로 내가 느낄 감정을 벌써 다 경험해버린 게 아닐까.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앞으로는 쭉 새로운 느낌은 하나도 없게 되는 건 아닐까."
나는 이 영화를 보다가 이 대사가 나오자 울었었다. 마치 십 년 뒤 내 감정을 안다는 듯이.
내사랑은 그네 타기와 같다. 그네를 타고 사랑하는 사람을 쳐다 보면,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네를 타고 보는 세상은 아이 같은 기분과 함께 꿈같다. 저 멀리 구름이 보이고 파란 하늘이 보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보인다. 하늘 높이 올랐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엔 꼭 내려와야만 한다. 내려올 때도 넘어짐 없는 착지가 필요하다. 안 그럼 피본다.
나는 이제 점선같은 내 마음을, 내 감정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충전해 보고 싶다. 좋아하는 스타일의 새로운 음악을 듣게되면 작은 몸짓으로 흥을 돋우고, 4월의 흩날리는 연분홍의 꽃잎을 보며 작게 감탄하고, 더 나은 내가 되고자 자그마한 노력들을 계속하며 내 어깨를 마주 안고 싶다.
내 인생 가장 힘들 때 누군가 보내준 듯이 홀연히 나에게 와서 존재만으로 힘이 되어주었던 사람. 다시 오지 않을 사랑. 하지만 이제 그 이름을 그만 불러야 한다.
나는 수면내시경을 받고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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