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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2
차마 수많은 인생의 색인을 뺄 수가 없어서, 널 놓을 수 없다. 이건 핑계가 되기에 충분하다. 우린 지금 어딜 가고 있는걸까.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그 속에 사랑이 가득 채워졌는지 모르겠다. 마치 질소 가득한 감자칩같다. 제조 회사에는 과자를 보호하기 위한 명분이라도 있다. 이 사랑 외의 것들은 우리의 사랑을 지키고 있긴 한가. 혹은 해치고 있는걸까.
“쟤 좀 봐, 발레하는 것 같아.” 중학생 2학년 때 정확히 너란 존재를 인지했다. 합동 체육 시간에 발레하듯 피구하던 아이. 양 손을 위로 올리고 턴하며 공을 피하던 옆반 남자애. ‘이상하다.‘ 그게 첫인상이었다. 1년 뒤 우린 같은 반이 되었다.
3학년 4반 교실에서만 보다가 학교 밖에서도 만났다. 토요일 저녁마다 1시간씩 시간을 보냈다. 주말마다 미사를 보고 오라는 엄마의 재촉에 떠밀려, 성당에 다녀오겠다는 거짓말을 하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바깥을 배회하다가 너를 만났고, 매주 성당 땡땡이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날이 갈수록 토요일이 기다려졌고, 귀가 시간도 점점 늦어졌다. 결국 들키고 말았다. 이후 엄마 손에 이끌려 신부님께 고해성사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때 널 만나게 해줘서 고마웠다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엄마에게 거짓말을 들켰을 때쯤 우린 연인으로, 서로의 짝꿍이 되었다. 좋아한다는 말은 했지만 사랑을 말하진 못했다. ‘15살짜리가 뭘 안다고, 사랑을 속삭여?’라고 고작 15년 살아온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 좋아한다는 말도 힘겨웠다. 목이 파르르 떨렸다. 입 안에서 맴돌기만 했다. 입술이 무거웠다. 나이에 맞는 단어가 있단 오만한 생각이었을까. 나의 마음이 사랑에 닿을만큼 무겁지 않았던 걸까. 그 말은 불씨를 활활 태울 산소를 싣고 장작불로 옮겨 붙을 게 뻔했다. 활활타는 사랑의 열기를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진심을 숨길 수 없는 그 순간은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덜컥 뱉었다.
“사랑해”
그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주는 사랑이 많아진 만큼 받고 싶었다. 그래서 많이도 싸웠다. 서로를 각자의 입맛에 맞추려고 애를 썼다. 연인들은 지하철 역 출구 앞에서 많이들 싸운다던데, 우린 놀이터였다. 수많은 싸움은 서로를 물들였다. 우리가 닮아가는 건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에게 자아를 의탁했는지는 몰랐다. 갑작스럽게 네가 앞으로는 자신으로 살고 싶다고 선언했다. 여태껏 내 삶을 함께 살아왔다고, 이젠 그만하고 싶다고 말했다. 네가 내 세상을 영유하길 바란 적 없었다. 우리의 우주가 넓어지길 바랐다. 그런데 왜 좁은 구석에서 커왔니. 날 사랑하냐는 질문엔 모르겠다고 답했다. 사랑이 아직 남아있다면 계속 만나자며 붙잡는 구질함에도 모르겠다고 일관했다. 기어코 칼자루를 나에게 쥐어줬다. 어쩔 수 없이 칼을 휘둘렀다. 그렇게 헤어짐을 고했다. 비겁한 아이에게.
치사하다. 예고라도 해주지. 괜히 노란불이 신호등에 있는 게 아닌데, 참 경우가 없다. 브레이크를 갑작스럽게 밟혔다. 뒤따라오던 사랑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서 나를 덮친다. 정신이 없다. 대학 입시를 앞둔 중요한 시기, 성적은 고꾸라졌다. 전교생 중 이렇게 성적이 하락한 아이는 나뿐이라며, 교무실에 불려 갔다. 혼날 줄 알았는데 다정한 안녕을 받았다. 그 따뜻함에 다 털어놓았다.
“선생님, 이쯤 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안 괜찮아져요. 저 할 일이 많은데 손에 안 잡혀요. 언제쯤 괜찮아질 수 있어요? 라는 질문에 돌아온 답은 욕심부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깍지 낀 두 손을 보여주며 말했다. “두 사람이 만나면, 깍지 낀 두 손 위에 여러 추억들이 덮히고 쌓여. 그래서 깍지가 더이상 깍지가 아니게 돼. 하나의 손으로 굳어지는 거야. 지금 넌 완전히 하나로 합쳐진 두 손을 억지로 떼어낸 거지. 그럼 피가 철철 나고, 옆에 살갗들이 너덜거리지 않겠어? 충분히 아파해도 돼.” 마음 놓고 아파하던 중, 너에게 연락이 왔다. 그 연락 한 통에 너한테 달려갔다.
널 다시 만났을 땐, 이미 변해 있었다. 사랑이 우선순위가 아니라고, 이젠 예전과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 변할 널 보며, 그럼 대체 너 누구냐고 물었다. 울부짖었다.
“이렇게 행동하면, 나 너 못 만나.”라는 말에 울음을 멈추려했다. 딸꾹질이 나왔다. 울음도 새어 나왔다. 손으로라도 막아봤다.
아직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너는 다른 사람이었다. 어떻게 아직 사랑하는 상대에게 저런 말을 하니.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거니. 그런데 그 껍데기라도 옆에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말뿐인 사랑이라도 상관없었다. 변한 너를 다시 만나기로 했다.
벌써 5년 전 일이다. 변했다고 하는 넌, 변하지 않았다. 또 다시 넌 말했다. “모르겠어.” 그 말 이제 진절머리난다. 대체 넌 언제 아는데? 네 마음을 누가 아는데? 우리의 장작불은 생명을 다 한 걸까. 불쏘시개가 될 네 사랑이 없는 걸까. 내 사랑은 무한 제공인데, 맘껏 태울 수 있는데... 우리 사랑에 불순물이 가득해서 더 이상 불쏘시개가 아니게 된 걸까. 못되는 걸까.
상처가 나면 살이 파이고, 회복될 때는 다시 붙어 새살이 돋아나듯, 우리가 다시 만나는 건 치유의 봉합같았다. 자연 치유 과정은 아니였다. 바늘과 실의 인위적인 힘이 필요했다. 잘 지내다가도 이따끔씩 떠오르는 그 날의 기억에 아파했다. 살갗이 뜯기고, 다시 봉합되는 과정에 떨어져 나온 피와 딱지들은 고스란히 남았다. 바늘로 꼬맨 흔적도 아직 선명하다. 회복하기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걸까. 회복이 안되는 걸까. 이렇게 널 놓지 못하는 물러 터진 내가 싫다.
널 놓으면, 내 수많은 청춘 색인도 함께 사라진다. 과거로부터 배우라고 하지만, 널 놓으면 기억을 되새기는 것조차 더 힘들어지겠다. 그동안 선명히 표시되었던 흔적들이라, 떼어낸다고 해도 조금은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핑계였던 이유도 이제는 힘을 잃어 가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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