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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2

사랑은 한 소설과 꽤 많이 닮아 있다. 바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한 존재의 등장으로, 소용돌이 치듯 전개되는 소설의 줄거리가 사랑의 양상과 닮았다. 특히,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한 모험에서 온갖 미션들이 주어지고, 그걸 깨나가면서 주인공이 성장한다는 점이.

사랑의 첫 단계, ‘호기심’. 전공 수업에서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사랑을 완벽히 안다고 하는 건 과연 좋은 걸까요? 사랑은 모르는 영역에 희망을 갖고 들어가는 게 아닐까요? 미지의 영역에 희망을 품고 들어가서 고통을 느끼고 나서야 깨닫는 것이 사랑 아닐까요?” 미지의 세계라..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시작과 굉장히 닮아 있다고 느낀 문장이었다.
소설 속 앨리스는 뛰어가는 흰 토끼를 발견하고 쫓아 따라가기 시작한다. 앨리스는 곧 토끼 굴로 굴러 떨어지게 되고, 새로운 차원에 다다른다. 사랑도 그렇게 얼떨결에 시작된다. 대부분의 사랑 역시 쉽게 예상할 수 없다.
상대가 궁금해진다면, 그것은 나의 세계에서 벗어나 타인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욕구가 발생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모든 건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가보지 않은 미지의 영역에 무엇인가 있을 거라는 모종의 희망을 품고 일단 뛰어든다. 그 순간 여정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여는 문’이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때 언제나 그렇듯이, 앨리스에서도 문이 등장한다. 앨리스는 이때 꽤나 고생을 한다. 자신의 몸집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통로에 들어가기 위해 진땀을 뺀다. ‘나를 마셔요’라는 쪽지를 발견하고 병에 든 음료를 마셨더니 앨리스의 키는 난데없이 줄어들고, 옆에 있던 케이크를 먹었더니 이번에는 무지하게 키가 커지는 바람에 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진다.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야 앨리스는 그 문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사랑의 과정에서 우리는 그 사람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스스로를 줄이고, 깎게 된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는 건 거대한 두 세계가 만나는 것과 같다. 상대의 생각, 말, 행동, 태도, 이 모든 것에 깊숙이 들어가는 것은 정말 두 우주가 충돌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처음으로 깊이 들여다본 타인의 내면은 충격적이고, 신비롭고, 때로는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존재’로 느껴지기도 한다. 서로는 서로에게서 발견한 간극을 메꾸기 위해 계속해서 공유하고, 다듬고, 자신의 자아라는 거친 돌멩이를 깎아나간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의 차원에서 벗어나 타인의 차원과 합쳐지는 과정이므로 ‘여는 문’이다. 그리고 이때 열린 문은, 오직 오로지 연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두에게도 조금 더 열리게 되어 곧 타인을 더 이해하고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세 번째는 퀘스트(혹은 시련)이다. 나를 제외한 또 다른 거대한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의 문에 나의 몸뚱아리를 끼워맞추는 이 과정이 마냥 순탄치만은 않다. 여러 시련이 분명 존재한다. 어쩌면 앨리스가 맞닥뜨린 시련들(카드여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홍학으로 크로케를 하는 것..등)보다도 더 강도 높은 시련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때 나는 여러 시련을 겪으며 이기적이었던 나를 잠시 바라보고, 이타적으로 변하려 하는 나의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상대를 위해 소중한 시간을 언제나 내어주고 아낌없이 돈을 쓰려하는 나, 성가심을 이겨내고 여러 불편을 감수하는 나.. 등 비효율적이고 수고로운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철학자 강신주는 말한다. ‘얼마나 수고롭느냐’는 곧 ‘얼마나 사랑하느냐’라고. 결국 수고로움을 계속해서 감수하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사랑의 결정적 단서일 수도 있다는 것. 이 단계는 따라서, 그를 향한 나의 사랑을 시험대에 오르게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사람을 위해 수고로움을 계속해서 감수할 것인지. 사랑의 진지함과 방향성을 평가해보는 시간이 온 거다.

마지막은 ‘열린 결말’이다. 시험대에 올라 통과하지 못한 사랑은 재단에서 떨어질 것이며, 통과한 사랑은 지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속된 사랑의 끝은 뭘까? 해피 엔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과연 결혼 뿐일까?
나는 사랑의 최고봉이 꼭 결혼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사랑에 있어서, 결과보다 과정중심주의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끝이 났든 계속 되든, 그 사랑의 잔재는 거름이 되어 나의 몸에 쌓였을 거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라는 칭호도 지겹다.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아니다. 이루어졌다가 다시 흩어진 것일 뿐. 마음을 다해 사랑한 순간이 분명 있었다면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될 때까지 최대한 하되, 결과는 작가의 의도에 맡기는 거다.
앨리스에게 또 다시 주어지는 두 갈래의 길. 새로운 차원의 세계에 머물 것이냐, 혹은 원래 있었던 지상의 세계로 되돌아갈 것이냐. 전자라면 영원의 약속을 지키면 되겠고, 후자라면 시선을 잠시 거두어 자신을 가꾸며, 새로운 사랑을 향해 다시 열려 있으면 된다. 언제 또 일어날지 모르는 모험을 향해서.

(12.2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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