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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3
[굳은살]
차마 인생의 수많은 색인을 뺄 수가 없어서, 널 놓을 수가 없다. 이건 핑계가 되기 충분하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 속에 사랑이 가득한지는 모르겠다. 마치 질소가 가득 찬 감자칩 같다. 제조 회사에서는 과자를 보호하기 위한 명분이라도 있다. 우리 사이에 있는 사랑 외의 것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서로가 말하는 미래에 우리는 없다. 미적지근한 온도를 유지하는 우리는 왜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걸까. 차마 끊지 못하는 걸까. 마음의 소리가 너무 작다. 잘 안 들린다. 완결되지 않은 관계 속에서 방향을 잃었다. 이 글은 방향을 잡으려고 마음에 귀 기울이는 과정이다.
“쟤 좀 봐, 발레하는 것 같아.” 중학생 2학년 때 너를 알게 되었다. 합동 체육 시간에 발레하듯 피구하는 아이. 양손을 위로 올리고 턴하며 공을 피하던 옆 반 남자애. ‘이상하다.’ 그게 첫인상이었다. 절대 친해질 일 없을 줄 알았는데 1년 뒤 우린 같은 반이 되었다. 3학년 4반, 인연은 그 교실에서만 이어질 거라 예상했다.
예상을 벗어났다. 우린 토요일마다 시간을 함께 보냈다. 엄마가 성당에 갔다 오라고 재촉한 덕분이다. 미사에 참석하겠단 거짓말하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바깥을 배회하다가 너를 만났다. 성당 땡땡이 짝꿍이 되었다. 날이 갈수록 토요일이 기다려졌고, 귀가 시간도 점점 늦어졌다. 결국 거짓말을 들키고 말았다. 이후 엄마 손에 이끌려 성당에 갔다. 거짓말에 대해 고해성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우리의 인연을 이어준 것에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그저 이상한 친구는 아니란 걸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이후 우린 연인으로서 짝꿍이 되었다. 그러나 사랑을 말하진 못했다. ‘15살짜리가 뭘 안다고 사랑을 속삭여?’라고 고작 15살짜리가 생각했다. 좋아한다는 말도 힘겨웠다. 목이 파르르 떨렸다. 그 말은 불씨를 활활 태울 산소를 싣고 장작불로 옮겨갈 게 뻔했다. 타오르는 열기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진심을 숨길 수 없던 순간은 빠르게 찾아왔다. 덜컥 밖으로 튀어나왔다.
“사랑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주는 사랑이 많아진 만큼 받고 싶었다. 그래서 많이 싸웠다. 연인들은 지하철역 출구 앞에서 많이들 싸운다던데, 우린 놀이터였다. 그 수많은 싸움은 서로를 물들였다. 그렇게 우리가 닮아가는 게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네가 자아를 의탁했었는지는 미처 몰랐다. 갑작스럽게 앞으로는 자신으로 살고 싶다고 선언했다. 여태껏 내 삶을 함께 살았다며 이젠 그만하고 싶다고 했다. 내 세상을 영유하길 바란 적 없다. 우리의 세상이 넓어지길 바랐다. 그런데 왜 혼자 좁은 구석에서 커왔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만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 표정이 너무 차가워서, 우선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아직 날 사랑하냐고 물었다.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사랑이 남아 있다면 계속 만나자며 구질구질하게 굴었다. 넌 허공을 응시하며 모르겠다고 반복해서 답했다. 자동 응답기 같은 반응에 지쳐 헤어짐을 고했다.
치사한 놈. 예고라도 하지. 신호등에 괜히 노란불이 있는 게 아닌데. 경우가 없다. 급브레이크를 밟혔다. 뒤따라오던 사랑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나를 덮쳤다. 정신을 못 차렸다. 대학 입시를 앞둔 중요한 시기, 성적이 고꾸라졌다. 교무실에 불려 갔다. 혼날 줄 알았는데 다정한 안녕을 받았다. 그 따뜻함에 다 털어놓았다.
“선생님, 이쯤 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안 괜찮아져요. 할 일이 많은데, 손에 안 잡혀요. 언제쯤 괜찮아져요?”라는 질문에 돌아온 답은 욕심부리지 마라. 그리고 깍지 낀 두 손을 보여주며 말했다. “두 사람이 만나면, 깍지 낀 두 손 위에 추억이 쌓여. 그래서 깍지가 더는 깍지가 아니게 돼. 하나의 손으로 굳어지는 거야. 지금 넌 완전히 하나로 합쳐진 두 손을 억지로 떼어낸 거지. 그러면 피가 철철 나고, 옆에 살갗들이 너덜거리지 않겠어? 충분히 아파해도 돼.” 이 말은 빠르게 극복해야 한다는 조급함을 잠재웠다. 그래서 맘껏 아파하기로 했다. 그리고 마음이 다할 때까지 연락했다. 답장은 없었다.
지쳐 연락하길 그만둔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만났을 땐 이미 변해 있었다. 쫑알대며 안부를 건넸지만, 딱딱한 대답만 돌아왔다. 게다가 이제 자신은 다른 사람이니, 예전 같은 다정함을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대체 너 누구냐고 물었다. 울부짖었다.
“이러면 나 너 못 만나.” 우는 날 달래줄거라 생각했다. 날카로운 말에 놀라 딸꾹질이 나왔다. 억지로 울음을 멈추려 했다. 새어 나오는 울음을 손으로 막아봤다. 아직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껍데기라도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말뿐인 사랑이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만났다.
벌써 5년 전 일이다. 변했다고 하는 넌, 사실 변하지 않았다. 또다시 넌 말한다. “모르겠어.” 그 말 진절머리 난다. 우리의 장작불은 명을 다 한 걸까. 불쏘시개가 될 네 사랑이 없는 걸까. 사랑 속에 불순물이 가득해서 불쏘시개가 아니게 된 걸까.
우리가 다시 만나는 것은 찢어진 살을 다시 꿰매는 치유의 봉합이었다. 이 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피와 부스러기들이 고스란히 남았다. 그 흔적에 가끔 아려오지만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 흉터가 깊은 살도 재생되며 굳어지겠다. 감각이 무뎌지겠다. 마침내 우리의 상처를 이겨낼 수 있겠다.
사실 초고의 결말은 달랐다. 초고를 다시 읽으면서, 내 사랑의 순도가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건 그 어떤 핑계보다 강력하다. 그래서 고쳤다. 급히 포장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을 담았다. 이 글의 끝은 우리 관계와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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