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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
<시에 대한 각서>_이성복
고독은 명절 다음 날의 적요한 햇빛, 부서진 연탄재와 삭은 탱자나무 가시, 고독은 녹슬어 헛도는 나사못, 거미줄에 남은 나방의 날개, 아파트 담장 아래 천천히 바람 빠지는 테니스 공, 고독은 깊이와 넓이, 크기와 무게가 없지만 크기와 무게, 깊이와 넓이 지닌 것들 바로 곁에 있다 종이 위에 한 손을 올려놓고 연필로 그리면 남는 공간, 손과 팔은 이어져 있기에, 그림은 닫히지 않는다 고독이 흘러드는 것도 그런 곳이다
<나비>_김참
아이가 나비 잡으러 가자고 한다. 아이 엄마는 방과 마루에 긴 머리카락 몇 올 남겨 놓고 병원과 요양원을 왔다 갔다한다. 엄마가 없는 집, 아이는 조금씩 적응해간다. 그런데 오늘은 아침부터 아이가 자꾸 떼를 쓴다. 나비 잡으러 가자고 한다. 씻어 말린 도시락통과 기저귀와 우유를 챙겨 집을 나선다. 나비 잡으러 가는 줄 알고 좋아하던 아이가 어린이집 앞에서 커다랗게 운다. 바짓가랑이 붙잡고 흐느끼는 아이를 겨우 떼어내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참 맑기도 하다. 어디선가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을 것 같다.
"나의 책 한 권 한 권은 새로운 내면적 상황의 결과였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원인이었다. 그리고 책의 완성에 이르기 위해 내가 그 속에 머물러야 했던 그러한 영혼과 정신 상황에 대한 최초의 선동이었다. 이를테면, 책은 구상되자마자 온통 나를 사로잡아, 나의 가장 깊은 곳까지 이르는 나의 모든 것이 그 책을 위한 도구가 된다. 나에게 이 책에 어울리는 개성 이외의 다른 개성은 더 이상 없다......"_앙드레 지드 [일기] 中
"달리 뭘 알아야 할 건 없어요. 인생이 뭔지 고민하지만, ‘고민하는 것’ 말고 달리 인생은 없어요. 찾으려 하니까 잃어버리고, 빠져나오려 하니까 갇히는 거예요. 그렇다고 찾지 않고 빠져나오려 하지 않으면, 안 잃어버리거나 안 갇히는 것도 아니에요. 어떻게 해도 안 되고, 어떻게 안 해도 안 돼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_이성복 [무한화서] 中
나에게 좋은 글이란, 나를 새로운 글쓰기의 부름 아래로 데려다 놓는 글이다. 그리하여 나를 바꾸는 글이다. 그리하여 내가 나에게 더 좋은 질문을 던지게하는 글이다. 어느날 고요히 날아와 내 집 창문을 깨버리는 공터 아이들의 야구공 같은 질문. 나는 나의 인생에 걸쳐서 한 줄의 좋은 질문을 찾고 있다.
<교실 열쇠>
선생님, 진영이 아직 안 왔어요
선생님, 민성이 자요
선생님, 너무 더워요
선생님, 너무 추워요
선생님, 숙제 검사해요
선생님, 은영이 숙제 안 가져왔대요
선생님,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 그거 저번주에 했어요
선생님, 칠판이 잘 안 보여요
선생님, 여긴 너무 어두워요
선생님, 여긴 너무 밝아요
선생님, 문이 안 열려요
선생님, 문이 안 닫혀요
선생님,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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