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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얼굴
나의 맨얼굴 한가지. 인종차별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콧대 높고 키 크고 앞서나간 과학기술을 가진 백인들이 보기에 짧똥한 동양인들은 얼마나 하찮을까. 흑인을 보고 머리가 꼬불꼬불하고 피부가 까맣다고 싫어하는 백인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흑인도 우리보다는 멋있는 존재들이다. 흑인의 운동실력은 동양인이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한계 그 이상이다. 그렇다면 동양인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끈기? 글쎄. 유럽 여행을 가보고 오니 외적으로 동양인이 백인과 흑인보다 뛰어난 점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나의 외적 기준이 서양 사대주의라 해도 할말 없다. 인권에 대한 배움이 부족했던 과거, 다소 폭력적인 방식으로 일어났던 인종차별들을 내가 백인이었다면 이를 막거나 아예 동참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자신없다.
일본 여행을 가서, 한 일본인이 큰 상점에서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며 '조센징'이라고 말하고 지나갔다. 그는 눈도 쳐다보지 않고 어떤 표정도 짓지 않고 그저 내뱉고 갔다. 너무 당황스러워 아무 대응 못하고 숨어서 울기만 했다. 나도 맞받아 치거나 복수라도 해주면 좋았을텐데. 내가 우는 것을 보고 누가 그랬냐고 묻는 친구에게, 저 사람이라고 가리키지도 못할 두려움에 휩싸였었다.
일본인이 우리를 모욕하는 것은 서양인이 동양인을 차별하는 것과 같은 어떤 외적인 기준은 아닐 것이고, 그들 나름대로 본인들이 한국인에 비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점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한국에 여행 온 중국인 무리에게 '짱깨들'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왜 그런걸까? 내가 사회적으로 시민의식이 중국보다 더 나은 한국에 속한 사람이어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주변 사람들은 일본에는 열등의식과 분노를, 중국에 대해서는 우월의식과 견제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한국에서 자라면서 이를 학습하고 습관처럼 이 인식을 꺼내 보인다. 나에게 '조센징'이라고 말한 일본인도 자신의 집단에서 마치 유머처럼 사용해오던 단어를 무미건조하게 내뱉은 것 아닐까. 한국인에 대한 습관적 불쾌감을 습관적 우월의식으로 제하려고.
사람은 본인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을 짓밟아 내림으로써 자신의 우월성을 더욱 드러내고 싶은 욕망을 가진다. 이런 욕망을 이용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다른 사람을 노예로 삼고, 무시하는 것을 당연한 일처럼 둔갑시키고 이에 동의하게 만들 수 있다. 쟤는 못생겼으니까. 쟤는 멍청하니까. 쟤는 가난하니까. 이렇게 해도 돼. 그리고 그런 인식은 같은 집단의 사람 간에 공유되어 문화가 되고, 습관이 되어 그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는다.
나는 이런 편견과도 같은 차별적 의식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는 차별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전자의 질문에 적절하게 답하고 그것을 이행하여 벗어날 수 있다면, 후자의 질문에 대해서도 초연한 자세로 답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아직 전자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어리숙한 답을 내보자면, 개인의 자존감을 높일 때 가능할 것 같다. 자존감이 높다면 애초에 남보다 내가 우월하다는 사실의 증명을 위해 남을 짓밟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존감을 높이는 것에 공을 들여 이윽고 집단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면, 진정 시민의식이 높은 집단이 완성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개인의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 집단의 자존감 상승으로 이어질지도 모르겠으므로, 자신없는 답변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은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한발짝 나아갔다고 만족해야겠다. 나의 맨얼굴이 이러하므로 나를 인종차별하는 자를 만났을 때 'Are you racist?'라고 뭐라할 자격도 없고, 자신도 없다.
(9.1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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