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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얼굴
1.영아 오늘은 네 생일이다.
세상 천지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너를, 혼자 세상에 와서 혼자 떠나 간 너를 몇 명이나 기억할까 네가 떠나고 반년도 넘게 흘렀지만 난 여전히 엉망진창 같다.
몇 달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멍청하게 지내왔지만 이렇게 한번 네 생각을 하면 그 시간들이 무색할 만큼 순식간에 모든 게 기억이 난다. 사람은 죽어도 얼마 동안 청각은 살아있다는 진짜인지도 모 를 말이 생각나서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너에게 이마를 맞대고 사 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되뇌었고 혼자 네 장례를 치렀고 혼자 너의 뒷정리를 했었다.
돌이켜 보면 참 무섭다 그렇게 담담할 수 있었다는 게. 아무도 믿지 못했고 허락도 되지 않았었나 보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는 데에 젬병이니까 우리는 서로를 지켜주자 고 약속했었는데 못 지켜줘서 계속 미안하다.
나는 너와 함께 있으면서도 늘 힘들어했었지 그래도 그땐 내가 망가져도 나 하나쯤 돌아갈 곳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성공하면 얼마나 성공하겠다고, 행복하면 얼마나 행복하겠다 고 너와의 시간을 헛되이 보낸 것 같아 후회가 된다. 나 그냥 너랑 살 걸 그랬다. 결혼이라도 해서 진짜 가족이라도 될걸 그랬다. 미친 사람들 보고 미쳤다고 같이 욕하고 미친 세상 지겨워서 죽고 싶다 면 부둥켜안고 같이 죽을 걸 그랬다. 더 좋은 사람들 소개해줄걸 더 맛있는거 먹일 걸 좋은거 더 많이 보여줄 걸 그랬다. 미친 세상이지 만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들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설득시킬걸 그랬다.
너는 내가 하루 15시간씩 일하고 괴롭다고 술 처먹고 들어와도 싫 은 소리 한 번을 안 했지. 출근해야 되는데 숙취 때문에 일어나지도 못하는 거 일어날 때까지 조용히 쓰다듬어 깨우고는 끼니 거르지 말라고 도시락 쥐여줬지.
궁금한 것도 어찌나 많은지 넌 세상 모든 게 다 궁금했고, 내 대답만 정답이었지. 한번 싫으면 절대 안 하는 네가 어렵고 이상하다면서 내가 읽는 시집을 베개맡에 두며 읽고, 내가 듣는 노래들을 수십 번 씩 반복해서 들었다 그런 너를 어떻게 보낼까 어떻게 잊을까.
영아 넌 언제까지 날사랑해 줄 거냐는 질문에 아주 오래도록이라고 대답했잖아
난 이제 아주 오래도록 널 그리워할 일뿐이다
2.영아 오늘은 당신 기일이다 그래서 여전히 당신은 없다.
천진난만하지만 어딘가 불안한 눈동자를 한 유년 시절 사진 몇 장, 필요한 것만 사서 아껴서 쓰는 성격을 대변하듯 100L 봉투 두 개 분량의 옷가지,종이박스 하나에 꼭 들어가는 유품.
정말이지 세상에 왔다 갔는지도 모를만큼 간소한 그 짐을 정리할 용기가 내게는 없어.
천지 어디에도 연고 없는 당신이, 나를 연인이자 친구이자 부모라고 여겼던 당신이, 나에게 아무 말 없이 생을 던진 후로.
나는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
평생을 외로워해도 끝까지 당신 곁을 지켰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아는 내가, 일면식도 없는 당신 지인들에게 사망 소식을 알리고 내 손으로 당신의 장례를 치렀다.
장례가 끝난 직후, 당신 지인들은 당신 대신에 나를 많이 찾았는데, 내가 소주를 열병 정도 먹고 신경안정제를 한 움큼 삼키고도 정신 이 멀쩡해서,
당신을 지켜주지 못해서 죽음으로 내몰았던 건 난데 너들은 관심이 나 있었냐고 나도 당신과 살던 이 집에서 살아서 나갈 생각 없으니 까 다 꺼지라고 했다가 한 놈에게 두드려 맞아서 병원 신세를 졌다.
돌이켜 보면 내가 당신을 수습할 자격이나,그 누가 당신의 친구를 자처하며 나를 폭행할 자격이 있었나 싶다.
심각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증,왼쪽 눈의 시력이 거의 날 아가고 코가 부서졌다. 나한테 남은 건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며 생긴 수천만원의 빚 그리고 엉망진창이 된 정신과 몸뿐이었다.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은 내가 그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있는 그릇이 못 됐었다고 생각해
나 당신이 떠난 후로 딱 한 번 울어봤는데,그건 슬퍼서 운 게 아니 라 무서워서였던 것 같아 당신 없이 살아갈 내 인생이 너무 막막해 서.
형편없지? 그 뒤로도 도망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느라 당신의 죽음 을 제대로 마주한 적 없었다 마주한다면 분명 난 견디지 못하고 죽 어버릴 것만 같았거든.
아무튼 나를 걱정한다는 인간들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여행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연애도 했다.
걔는 본인이 나한테 안정제가 될 수 있을 거라 자신하다가 마음대 로 되지 않자 나를 떠났는데, 웃기지 두 달 만나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정을 주면 쉬이 놓지 못하는 성격 탓에 내 과거는 늘 인간관계로 말 썽이었는데, 이제는 누가 오고 가는 것 들이 진심으로 상관없어서 예전 시간들이 미련스럽게 느껴진다.
나는 뭘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살았던 걸까 이젠 나 이외엔 무엇도 나를 바꿀 수 있는 게 없는데.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어서 매일같이 술에 취해 약을 먹은 건 난데 세상은 놀랍도록 빠르게 잊더라.
그렇게 나는 막막한 부채감으로 여기까지 왔고 지금도 어떤 생각을 하던 그 시작과 끝에는 당신에 관한 생각으로 넘어가는 지점이 있다.
조금씩 회복해 가는 스스로를 보다가도,이런 나를 기꺼워할 당신 생각에 다시금 먹먹해 지길 반복해.
있잖아, 우리에게도 다음이 있다면 내가 당신 없는 삶을 버티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이루고서 당신 앞에 왔는지, 아주 오래도록 설명하고 싶어.
그러기 위해선 일단 살아야겠지 살아남아야겠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거고 지지도 않을 거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삶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적어도 당장 죽어도 떳떳하게 죽기 위해 살아볼게.
이제는 당신의 죽음을 제대로 받아들여보려고 해 이따금 무너지면 한 번씩 꿈에라도 나와줘라.
오늘을 빌어 길었던 내 우울과 작별을 고하며, 당신의 안녕을 빈다.내가 선택한 내 가족
사랑해 영원에 가깝게.
(14.0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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