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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아아, 오늘은 정말 쓰고 싶지 않은 날이다. 한 번씩 이런 날이 오는데, 자발적 의무로 굴러가는 기간에 와버리다니, 운도 참 없다.
욕망은 의무와 관련이 깊다. 나는 ‘~해야 해’라는 문장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기서 나뉘는 게 자발적 의무와 비자발적 의무인데, 전자의 경우 저 문장이 의무감으로, 후자의 경우 명령문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후자이다.
’당연히‘와 ’해야 해‘ (명령문)는 최악의 궁합이다. 뭐랄까, 엄격한 부모 둘이 만나서 자식 괴롭히는 느낌이다. ’당연히‘는 이유가 없고, 설명하기 귀찮음을 나타낸다. ’해야 해‘는 정답이 있다는 듯이 군다. 나는 그 말에 의문을 던진다. 그럼 ’그냥 원래 그런 거야‘, ‘그냥 해’, ‘그게 맞으니까’라는 답이 나오곤 한다.
반면 ‘해야 해’ (의무감)는 내가 그 이유를 안다. 쉬운 예를 들면 ’A를 하면 B가 나오고, 그 B는 네게 의미가 있어. 그 의미란 C야.‘라는 도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하기 싫어도 하게 만드는 생각이다.
둘의 차이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이유와 나의 맞닿음‘이다. 명령문을 쓰는 사람은 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대답이 와닿지 않는다. 그런 명령은 내게 있어 당위를 가지지 못한다. 불가능을 답하게 만든다.
이런 나의 욕망을 정리하자면, ‘의무의 최고점이 ’자발적 의무‘가 되는 것’이다. 무차별적 ‘해야 해’ (명령문)가 세상에 만연하고 있다. 이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 특히 나는 나일 때 가장 행복한데, 그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찾아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숨쉰다는 게, 제일 두렵고 폭력적이다.
혼자 있을 때 생겨나는 것이 이러한 생각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와 같은 생각들. 필요하다. ‘나’ 없이 거리에 있기 싫다. 누군가는 내 욕망을 보며 어린애 같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어린애는 더 솔직할 뿐, 깊이는 어른보다 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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