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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떠나고 싶다.
기회만 되면 어디로든 떠나고 싶다. 한 곳에 머무르고 다를바 없는 일상을 보내다보면 마음 한 켠이 답답해진다. 내가 ‘나’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떠날 때 친구나 가족과 함께 하지 않는다. (물론 혼자 여행한다고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되는 것도 아니지만.) 여행할 때 나는 ‘나’라는 울타리의 공간을 조금씩 넓히거나, 그것 너머의 공간을 탐험하고, 하게 된다.
그런데 나는 여행이라는 개념이 공간에 한정된 것도 아니라 생각한다. 시간 여행도-미래에 대한 상상의 차원에서-가능하다. 나는 자주 할아버지가 된 나를 상상한다. 또는 병상에 누워서 마지막 2-3초를 남겨둔 나를 상상한다. 그럴때면 ‘나’라는 한계적 개념이 품고 있는 가장 위험한 본질을 마주치는 것 같다. 이런 여행에 대한 상상은 그것이 끝나는 순간, 의식 속에 현실의 모든 현실적인 것들이 녹아내리게 하기 때문에-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지-, 위험한 욕망이다.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기회만 되면 돌아가고 싶어진다. 그곳은 당연히 ‘집’이라는 장소를 우선적으로 둘 수 있다. 나는 여행도 자주 다니고 집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생활을 한 경험도 꽤 있지만, 동시에 이사를 한번도 한 적 없는 토착성의 사람이다. 나의 집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어서 거의 30년의 세월을 간직하고, 나와 가족의 대부분의 기억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집은 나에게 가족만큼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이기적이지만, 어딘가로 떠나더라도 그 집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장소가 사라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런데 돌아갈 곳이 집뿐인 것도 아니다. 집에 분명 있는데도 어딘가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럼 나는 또 위험한 시간여행을 해서 돌아가야 한다. 초등생 시절 어느 화창한 날 일요일, 어머니는 청소를 하고, 누나는 피아노를 치고,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때 누나는 Summer 라는 곡 하나만을 반복해서 연주했고, 언제든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 시간으로 돌아가게 된다. 심지어는 이런 어린 시절의 추억뿐만 아니라, 기억이 없는 아기였을 때로도 나는 돌아가고 싶다. 친구들끼리 재미삼아 하는 질문으로 ‘너는 과거로 돌아간다면 언제로 가고 싶’냐고 물었을 때 나는 태어난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기억을 잃고 모든 것을, 좋은 것뿐만 아니라 나쁜 것도, 다시 반복하는 것이 나는 두렵지 않다. 두려운 것은 돌아가지 못하는 현실의 ‘나’이다. ‘나는 어쩌다 이만큼 살아온 걸까?’ 길에서 우연히 줄지어 가는 유치원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들면서 무서워진다.
떠나고 싶다, 그런데, 돌아가고 싶다!
(6.9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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