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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
보슬비가 내렸습니다. 현관을 나서니 상쾌한 공기가 느껴집니다. 바닥은 적당히 젖어 있어 평소보다 진한 색을 띠고 있네요. 해를 가린 구름 탓에 어스름한 하늘과 빗방울이 맺힌 나뭇잎들. 채도가 낮게 느껴지는 이 비가 막 개인 뒤를 좋아합니다. 이런 날 별다른 걱정 없이 산책을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죠.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비 갠 아침이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런 순간은 잘 찾아오지 않기 때문에 더 소중하겠죠.
한 가지만 더 욕심을 내 볼까요. 낯선 이국땅에서 맞이하는 비 갠 아침. 저는 계획 없이 무작정 떠난 여행에서 일주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 도시의 면면을 발로 걸으며 충분히 들여다보았고, 이젠 이 거리가 꽤나 익숙합니다. 지도를 보지 않고도 숙소로 찾아갈 수 있죠. 어제 저녁엔 비가 왔습니다. 눈앞의 풍경들이 다시 낯설게 바뀌었습니다. 우산의 모양과 색들도, 비를 피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내가 살던 동네와는 다릅니다. 큰 통창이 있는 카페에서 거리 구경을 실컷 하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이국의 땅에서의 비 갠 아침.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만나면 이를 뭐라 표현해야 할까요? 매우 좋음?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네요. 내친김에 욕심을 하나만 더 내보자면 이 모든 감상에 심정적으로 동의하며 흔쾌히 산책 길에 동행 할 인연이 있다면 행복할 겁니다. 좋아하는 것 더하기 좋아하는 것 더하기 좋아하는 것. 아니 세 개 부터는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가 될 것 같네요. (좋아하는 것^3)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해야하겠네요.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하다가 싫어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 하려니 기분이 묘합니다. 날씨와 산책을 떠올리며 기분이 좋았었는데, 굳이 싫어하는 것을 이야기하며 떠올라있는 기분을 왜 다시 내려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일찍 자는 것을 싫어합니다. 재미있는 일은 밤에 주로 일어나거든요. 책도 영화도 밤에 보아야 더 재미있습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 '밤이 새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지 않나요? '해가 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는 뭔가 느낌이 약하군요. 특히나 새벽은 조용하고 차분하고 감성적이기까지 하죠. 그래서 일찍 잔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실수로 일찍 자버린 다음 날이면 하나의 밤을 놓쳤음에 아쉬워합니다. 어제 일찍 잠들지만 않았어도 밤새 좋은 글을,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이는 전 인류적인 손실입니다.
저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다가오길 바랍니다.
그런데 의문이 하나 들지 않나요? 늦게 일어나고자 하는데 어찌 비 갠 '아침'을 맞을 수 있느냐.
여러분, 낮 12시 전까지는 아침이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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