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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
좋으나 싫으나 다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연관성이 없을까. 답은 ‘아니요’다.
‘무언가를 사랑한다. 그러니 그 무언가에 어긋나면 나는 그것을 싫어한다.’
단순한 공식이나, 사랑 아래 태어난 세상에서 강력한 힘을 가질 것이다. 이 공식을 토대로, 좋고 싫음을 나열해 본다. 다소 단순하고, 이분법적으로 말이다.
사랑하는 것 : 생각, 시, 죽음, 아름다움
인간은 생각을 버릴 수 없다. 나를 죽여가는 위험마저 매력적인 단어이다.
10대의 나는 생각이 부족했다. 어지러움에 나를 바라보지 못하였고, 남들이 하는 거 좋아 보여서 다 따라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 시절에 산 옷을 단지 ’촌스럽다‘는 이유로 버리지 않았다. 아름답지 않아 버렸다.
시는 생각의 집합체이다. 쓰는 것도, 읽는 것도 다른 형태의 문학보다 더 많이 소요된다. 의미를 숨기고, 세상에 자신을 더한다.
타인의 세계를 그 짧은 글 안에 해석하는 것, 한 번에 되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는 문학적 천재일 것이다.
적어도 나는, 수많은 읽어냄 끝에 유추한다. 그리고 그 시선에 나를 더한다. 그 순간 ‘나’는 확장되고, 시야가 넓어진다. 단지 읽은 것이 전부였는데 말이다. 이게 바로 시의 매력이다.
죽음으로써 삶을 마무리짓는다. 우리의 혼란은 깨달음을 위한 전제이고, 그 결론을 죽음의 앞에서 정리한다. 혼란은 가끔,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벅차다. 그렇지만 그 뒤 깨달음은 언제나 유의미했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결론인 죽음, 얼마나 아름답고 명쾌할까. 혼란-깨달음의 반복인 삶, 죽음을 위해 받아들인다.
아름다움에 끌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은 결코 외면에서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더럽다 말하는 것도 아름다울 수 있다.
내게 있어 아름다움은 빛이다. 그리고 개인의 빛은 개인의 특색이다. 사물, 사람 다 상관없이 ‘그’만의 것이 있으면 눈에 띈다.
‘하찮은 귀여움’, 몇몇 캐릭터를 보며 그리 표현하더라. 반짝거리는 눈이 없어도, 맹하고 바보같은 표정이어도 사람들은 좋다며 굿즈를 마구 사대지 않는가. 내가 말하는 빛은 바로 이런 빛이다.
나는 타인도, 나 자신도 빛으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누구나 다 그러겠지만 10대의 불안정함은 빛을 흔들리게 만든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사람1에 불과했던 내 10대를 생각해 보면, 그저 안쓰럽기만 하다. 아직까지 빛나지 않더라도, ‘나’를 찾아가는 지금이 행복하다.
이제,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싫어하는 것을 말한다.
싫어하는 것 : 생각의 비어 있음, 다 보여주는 글, 삶, 추잡함
생각은 자신을 자신답게 만들어 준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부터가 생각이지 않은가. 생각이 없다면 당신의 무엇을 아는지 궁금하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혼란스러워진다. 혼란에 휩싸여 날아가지 않게, 발에 힘을 주는 것이 현시대의 모양새다. 힘을 주기 위해선 ’내‘가 강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강함은, 정체성에서 비롯된다.
다 보여주는 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글에는 정해져 있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심하게 보여주면, 나는 그저 글에게 따라가게 된다.
서술자의 의도를 파악해 보는 행위가 글의 즐거움이다. 그럼에도 따라가라 한다면, 영혼 없이 문장을 짚게 된다. ‘그렇구나, 그렇네‘의 반복은 설명문에서나 유효하다. 내게 있어 그들은, 지도자가 아닌 명령자에 불과하다.
삶이 싫다. 정확히는 혼란 가득한 삶이 싫다. 세상은 언제나 게임처럼, 몬스터의 레벨을 업그레이드한다. 깨달음이란 무기는 몬스터 처치에 적합하지 않아, 수많은 게임 오버 속에 클리어하게 된다.
보상도 짭짤하고, 나름의 재미도 있다. 하지만 그건 컴퓨터 속 화면이지, 현실에서의 게임 오버는 ‘내가 왜 죽어야 해’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어온다. 혼란은 언제나 나를 죽여가고, 그 끝은 없다. 그렇기에 삶이 싫어 죽을까- 란 생각을 수천 번 했던 것 같다. 세상과 삶은 너무나도 하드코어한 게임이다. 불쾌하고 재미도 없는 게임.
추잡함이 싫다. 못생김은 아름다울 수 있다. 하지만 추잡함은 억지스럽다. 그래서 아름답지 않다.
인정하지 못하는 삶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자기맹신에 이르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이론을 강요하고, 다른 이들의 것이 틀렸다며 우겨댄다. 그들은 자신이 마치 좋은 연설가나 토론가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 생각하겠지만, 그 자격은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들만 모른다.
명령문을 싫어하는 이유도 이 단락에서 비롯된다. 대표적인 명령문, ‘Love yourself’가 있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 좋은 말이지만, 그 유행은 참담했다.
내 어머니께선 내가 조금이라도 자조적인 멘트를 던지면, 조건반사적으로 ’왜 그러니? 너 자신을 사랑해야지.‘라고 하셨다. 텍스트만 보면 이상하지 않으나, 말의 분위기는 ’너 정말 이상해. 왜 그래? 이게 맞는데 말이야.’라는 전달이었다.
물론 자신을 사랑하는 게 건강한 태도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Love yourself’는 내게 폭력적인 강요에 불과했다. 강요가 필요할 정도로 혐오가 만연하던 시대였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생각한다. 차라리 자신의 ‘Love myself’를 보여주며, 내게 권유하는 것이 더 평화롭지 않았을까- 라고 말이다.
이제 나열이 끝났으니, 모든 것을 아울러 결론을 도출해 본다. 나는 사랑에 어긋나면 싫어한다- 고 도입부에서 주장했다. 지금까지의 나열을 보면, 그 사랑의 출발점인 ‘나’를 지키는 데 집중되어 있다.
‘생각 - 생각의 비어 있음’의 대립은 ‘나’를 찾아야 함이다. ‘시 - 다 보여주는 글’의 대립은 그러한 생각을 키워내며, ’나‘를 확장시켜야 함이다. ‘죽음 - 삶’의 대립은 ‘나’의 혼란스러움으로 이루어진다. ‘아름다움 - 추잡함’의 대립은 ‘나’의 빛을 찾고, ‘나’와 타인을 존중하고 인정하자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무력한 세상 속에서 고개 숙이고 싶지 않다. ‘나’를 바로 서게 하는 확신, 그 모양은 바로 사랑이다. 지금 나는 출발선 앞에 있다. 사랑이란 바톤을 쥐고, 어느 한 그림책의 문장을 되새기며 자세를 취한다.
‘작지만 살아 있는 나는,
여리지만 살아 있는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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