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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

나는 몰랐다.
이사를 할 때, 현관문과 창문을 활짝 열어두면
내가 초대한 사람들만 들어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새로운 공간에 설렘으로 가득했던 그 순간,
낯선 손님들도 몰래 따라 들어올 수 있다는 걸 그땐 정말 몰랐다.

이사한 다음 날, 설레는 마음으로 잠에서 깨어 화장실로 향했다.
그때 우리 집 욕실화는 '미키마우스 신발'처럼 앞 코가 막혀 안이 보이지 않는 구조였다.
아무 생각 없이 슬리퍼를 신었고,
‘파사삭-’
뭔가가 밟히는 소리와 함께 발밑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놀라서 황급히 발을 빼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슬리퍼 안에서 검은 물체 하나가 튀어나왔다.

날아오르더니 이내 뒤집혔고,
수없이 많은 다리를 자랑하며 바닥을 꿈틀댔다.

바퀴벌레였다.

그 날의 공포는 내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 이후로 나는 다리가 많으면서 날 수 있는 생명체를 모두 싫어하게 되었다.
외관상 아름다운 나비조차도 싫다.
이 글을 쓰는 지금조차,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 만큼.

_

내가 좋아하는 건 '여행'이다.
아직도 첫 해외여행의 전율은 생생하다.

성인이 되어, 아르바이트로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처음 떠난 싱가포르.
그 날, 나는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영상으로, SNS로, 책으로 수없이 봐왔던 풍경과 삶들이
눈앞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정말 사람이 살고 있었고,
정말 낯선 언어들이 귀를 간질였고,
정말 TV 너머의 그 세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여행 마지막 날 저녁,
가든스 바이 더 베이에서 슈퍼 트리 쇼를 보는데 눈물이 났다.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 곧 끝나는구나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온 뒤,
"꼭 여행을 다녀봐. 시간이 지나면 그 며칠의 기억이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해."
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따금 반복되는 일상 속,
'평생을 이렇게 지루하게 살아야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 때면, 사진첩 속 여행 사진을 꺼내 본다.

그 순간의 즐거움과 행복이, 화면 너머로 다시 전해진다.
그리고 나는 다시 다짐한다.
‘열심히 살다가 또 여행 가야지.’

또 내가 좋아하는 것은,
몸도 마음도 지친 하루가 끝난 밤
억지로 일으킨 몸으로 따뜻한 물에 씻고 좋아하는 향수를 이불에 뿌린 뒤,
다리 사이에 바디필로우를 끼우고 퐁신한 이불과 베개 속에 푹 파묻히는 순간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루하거나, 따분하거나, 지치고 힘들어야만' 비로소 더 가치가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몇 번이고 떠올려 보았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조건 없이 계속 좋아하는 무언가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세상에 그런 것이 있을까?
몇 번이고 반복해도 싫증 나지 않고,
어떤 감정 상태에서도 무조건적으로 좋아할 수 있는 것.

하물며 사람과 사랑에도 권태기가 오는데 말이다.

(7.1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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