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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루다
나를 돌보는 여름
여름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아니지만 가장 살아있음을 느끼는 계절이다. 여름엔 몸도 마음도 충분히 녹아있어서 외부의 자극을 잘 받아들일 수가 있다. 쨍한 햇볕에 핑-도는 것 같은 아찔함, 조금씩 베어나오는 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담은 유리컵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들, 습도가 높은 공기의 묵직함 등 사소한 것들도 깊게 느낄 수 있다.
나는 퇴근을 도보로 하는데, 여름에는 15분이면 충분한 길을 뱅뱅 돌아 두 시간에 걸쳐 걷고 또 걷는다. 여름밤의 산책은 너무 좋아서 단 하루라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아무 생각 없이 또는 망상. 지난날 부끄러웠던 내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유효기간이 끝나버린 관계들을 생각하며, 나를 존중해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보고 싶은 사람을 그리워하다가 앞으로의 미래 같은 것들도 생각하며 무작정 걷는다. 걸어온 발자국엔 걱정, 불안, 후회, 미련 등을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처럼 조금씩 떨어뜨리고 온다. 그 빵조각을 이정표 삼을 일은 없겠지만.
집 앞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와 샤워 후 벌컥벌컥 반 샷을 마시고 선풍기 앞에 누우면 행복한 것 같다. 행복하다고 말하기는 싫고 행복한 것 같다고 말하고 싶은 정도의 행복이다.
정신과에 다니는 친구는 세로토닌을 처방받고 복용하니 우울한 기분은 사라지고 긍정적인 생각이 든다고 하였다. 세로토닌은 행복을 느끼게 하고 우울, 불안을 줄이는 데에 기여하며, 햇빛을 받으면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햇볕이 넘쳐흐르는 여름은 우주가 내게 어찌어찌 잘살아 보라고 1년에 한 번씩 주는 선물 같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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