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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모든 아이들은 자란다. 한 명만 빼고. 그 애는 자기를 '아키'라고 소개했다. 아키를 처음 만난것은 내가 아직 나눗셈에 서투를 때였다.

학교에서 곱셈을 배울 때 쯤 나는 전학을 갔다. 여름의 한 가운데에 이사를 한 우리 가족은 연신 땀을 흘려가며 집기들을 날랐다. 짐을 잔뜩 실을 트럭은 한참이나 길을 내달렸고, 버스가 몇 대 다니지 않는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트럭 기사님은 마을 어귀에 있는 2층짜리 주택의 작은 마당에 우리와 물건을 내려주었다. 부모님은 이제부터 이곳을 고향으로 생각하라고 하셨다. 나는 넓은 마당과 집 안 거실에 2층으로 가는 계단이 있음에 너무 나도 즐거웠었다.

집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학교는 운동장에 아름드리 나무가 있었다. 아마 그 당시 내 나이보다 많았을 것이다. 어쩌면 부모님 보다 더.
나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그래서 이미 친분이 두터워진 아이들 틈으로 끼어들기 어려웠다.
나는 학교를 마치면 주로 마을 도서관에 갔다. 더위를 피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특유의 깔끔하고 차분한 느낌이 좋아서 이기도 했다. 난 그곳에서 아키를 만났다.

그날도 어김없이 학교를 마치고 마을 도서관으로 갔다. 학교에서 배운 나눗셈 문제를 수차례 틀려서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었다. 뾰로통한 얼굴로 나는 도서관까지 달려갔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그 앞 정수기로 가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지는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한 잔 더 마시려고 정수기의 출수구에 컵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 컵을 쥔 조그마한 손이 나를 앞질렀다. 뻘쭘해진 나는 그 손의 주인을 흘끔 쳐다봤다.
아키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하늘하늘한 줄무늬 원피스에 어깨를 살짝 덮고 있는 길이의 검은 머리 하고 있었다. 햇볕에 적당히 그슬린 피부에 생기있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그.. '가을의 아이'랄까, 그런 느낌이었다. 아키는 물을 마시고 나를 싱그럽게 쳐다봤다. 나는 물을 마시려던 것을 까먹었다.

아키는 항상 도서관에 있었다. 그 애는 또래에 비해 아는 것이 많았다. 늘상 책과 함께해서 일까. 그래서 나도 덩달아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곳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었다. 아키는 그 안에서 한없이 자유로웠고 거칠것이 없었다. 나는 그 아이가 그 곳에서 온 사람이 아닐까 하고 종종 생각했다. 아키는 나의 세계에도 함께했었는데, 도서관 뒷 산(지금 생각해보니 야트막한 언덕 정도였을 것이다)을 탐험하기도 하고, 도서관 옥상을 몰래 올라가 무언가 금지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난간을 붙잡고 키득거리기도 했다. 그때 아키는 내게 무슨 말을 했는데 나는 그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이를 다 드러내며 웃었다. 그 애는 나를 보며 이렇게 환하게 웃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했다. 폐관 시간 이후 불이 꺼진 도서관에 숨어있다 경비 아저씨에게 쫒겨 내달린적도 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각자의 세계에 익숙해졌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나는 새로운 학교 생활에 적응을 했고 친구도 점차 늘어갔다. 이젠 나눗셈에도 능숙해졌고 각종 도형 문제까지 막힘 없이 척척 풀어냈다. 나는 갈 수록 도서관에 가는 일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가끔 그 곳에 갈 때마다 아키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그 애의 미소는 여전했다.

아키는 첫 만남에서 자기가 일본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곧이곧대로 그 말을 믿었었다. 아무리 봐도 아키가 한국식 이름은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자라면서 의심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아키의 본명을 알고 싶었다. 전기장판을 꺼내야 할 날씨가 되었을 때, 우린 아키의 국적에 관한 문제로 작은 말다툼을 했고 그 뒤로 아키는 도서관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키가 없는 도서관은 나에게 아무 의미 없었기에 드물게나마 유지하던 발길 마저도 완전히 끊어버렸다.

그 해 겨울엔 온 세상을 다 덮어버릴 듯 눈이 왔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우리 마을에서 제일 큰 눈사람을 만드는게 목표였다. 문득 아키도 눈을 좋아하는지 궁금했다. 이젠 물어볼 수 없게 됐지만. 전화번호나 집 주소 하나 몰랐으니까. 옆에서 콧물을 흘리며 눈을 뭉치고 있는 녀석에게 아키에 대해 물어봤지만 우리 동네에 그런 여자애가 어디있냐는 푸념같은 말만 돌아왔다. 그렇게 아키는 잊혀져갔다.

몇 년 뒤 우리는 도시로 다시 이사를 갔다. 아마 아버지의 사업이 다시 잘 풀린 탓이리라. 그 마을을 떠날때 나는 슬픈 느낌을 받았다. 나에겐 이미 그곳이 고향이었을까?


오늘은 내가 애지중지 키우던 딸의 결혼하는 날이었다. 거리에 가득 떨어진 낙엽보다도 더 많은 감정의 격랑이 몰아친 하루가 지나갔다. 요즘 가뜩이나 건강이 좋지 않던 나는 죽을 만큼 피곤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아주 긴 꿈을 꿨다. 그리운 어머니, 보고픈 아버지.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고향 집 거실에 내가 서 있다. 내 방 문 귀퉁이 벽면에는 해마다 내 키를 기록해 놓은 표시들이 층층이 쌓여있다. 그 앞에 서 본다. 마지막으로 표시한 눈금이 내 가슴팍에서 끝난다. 나는 벽에 기대서서 더듬더듬 내 키를 기록한다. 마지막 눈금보다 적어도 두 뼘은 차이가 났다. 방 한켠에 놓인 거울을 보니 백발이 성성한 나의 모습이 보인다. 순간 잊고 있던 아키가 떠오른다. 나는 아키의 본명에 왜그리도 집착했을까. 일본인이면 어떻고 미국인이면 또 어때서. 나는 아키에게 사과를 하고 싶다. 하지만 아키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아키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데.. 그때 작은 손이 불쑥 들어와 내 오른손을 잡았다.

아키다.
아키는 예전 모습 그대로다.
나는 사과 하려했던 것을 까먹었다.
아키는 여전히 싱그러운 웃음을 건냈고, 나는 예전처럼 환하게 웃어보였다.

(13.8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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