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포도
하나를 먹어도 다섯 개가 남는 손가락은 화장실에서 건포도가 된다 습한 화장실에서는 달짝지근한 피비린내가 나요 물보다 진한 것은 피가 아니라 피보다 진한 것이 물 물의 성질을 가진 것들은 하나 피를 말리면 진한 눈물 자국이 있다 세면대에서 건포도의 기억을 봤어요 곱고 투명해서 훤히 들여다 보였죠 발가락이 일곱 개였어요 수분이 다 날아가 건포도가 질겨지는 시간 동안 사랑하는 이의 눈자위를 생각하며 나의 손가락 주름을 쓰다듬게 되는 것이다 엄마의 시간은 언제 말라? 엄마의 실루엣은 화장실에서 늘 주저앉아 미끄러지고 내려앉은 주름과 갈라지는 운명의 갈래를 어떻게 견뎠어? 창밖엔 일요일에 널린 주름진 그림자가 양팔을 벌리고 있다 엄마의 여섯 손가락은 품 무고한 엄마의 여섯 개의 건포도를 물고 뜯고 씹고 맛보며 빨래가 메말라가는 방식으로 숨쉬는 법을 배워요 주름은 접히는 방식으로 삶을 기억한다 엄마는 축축한 화장실 바닥에 누워서 나를 쓰다듬는다 왼손은 엄마의 주름진 얼굴 건포도처럼 찡그린 채다 입안이 온통 달짝지근해 삶은 끈적하고 웅크린 것들의 하루는 언제 눈을 감나 살만 맞닿아도 위로가 될 수 있더라 화장실 바깥에 우뚝 핀 나무처럼 튼 살을 가진 엄마, 내가 왼손잡이였다면 오른손은 주먹을 덜 쥐었을 거야 왼편에서부터 오른쪽까지 직진으로 사랑하는 법만 알아 짓눌린 건포도를 만질 때마다 오른편은 무겁고 왼편은 묵묵하다 세면대에 있었다 내 살갗만으론 다 알지 못했던 날들이
등록번호 : 100068
이 시는『시월』 님이 쓴 것입니다. 작가 프로필 보기(클릭 이동)
●작가의 한마디:
"주제는 모성애지만 제 시의 화자는 자식이에요. 그래서 어쩌면 주제와는 좀 맞지 않을지도 몰라요. 주체가 엄마가 아닌 자식이니까요. 이 시는 사실 엄마에 대해 쓰려고 쓴 시는 아니었어요. 쓰다 보니 엄마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된 시예요. 건포도 - 붉음 - 피 - 물 - 건조 - 주름 이런 흐름으로 확장되는 시예요. 늙고 주름이 생기는 게 젊은 나도 서러운데 이미 늙어 버린 대상인 엄마가 있어요. 나와 대칭 점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나와 가장 닮은 사람인 덜 사랑하는 법 따위는 모르겠는 나의 짝사랑의 대상인 엄마에 대한 얘기예요. "
●인스타그램:
"moon_oct"(클릭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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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일 전
건포도라는 단어가 이렇게 생생하게 다가왔던 적이 없었네요. 모성을 말하기 위해 자식의 입장에서 시를 쓰신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피와 물이라는, 혈육 얘기를 할 때 흔히 나오는 소재를 뒤집으면서 시가 출발하니 더욱 집중이 잘 되었네요! 좋은 시 정말 잘 읽었습니다! 84일 전
가장 마음에 강하게 꽂힌 시.. 계속 읽고 또 읽습니다 직관적으로 관철하기는 힘들지만 곱씹을 수록 본질에 가까워지는 느낌입니다. 작가님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집니다. 78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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