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적 소설가의 논픽션
2024.06.17  ·   by 크리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종종, 손쉽게 평가절하되곤 합니다. 심지어 같은 작가들끼리도 그렇습니다.

<햄버거에 관한 명상>(1988)이라는 시詩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장정일은 동종업계 사람들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시인은 단지 언어를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최상급의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턱없는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시인은 그저 시가 좋아 시를 쓰는 사람일 뿐으로, 열정적인 우표 수집가나 난(蘭)이 좋아 난을 치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들의 열정에는 경의를 표하는 바이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우표 수집가나 난을 치는 사람을 지식인으로 존경할 수 없다. 시인의 참고서지는 오직 시집밖에 없으니, 시인이란 시 말고는 모르는 사람이다."
(장정일의 공부)

이런 박한 평가에는 아마 그래서 당신 작품이 세상의 무엇을 바꿨느냐, 등 따신 곳에서 거드름이나 피우며 젠체하는 것 아니냐, 세상 사람들의 진짜 목소리를 아느냐, 는 문제의식이 담겨있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결 자유롭습니다. 그가 쓴 르포타주, <언더그라운드>(1997)라는 논픽션 덕분입니다.

이 책은 1995년 3월 20일, 도쿄의 지하철에서 벌어진 '사린가스 테러' 사건을 다룹니다. 당시 사이비 종교였던 옴진리교 신자 5명이 도쿄의 지하철에 맹독성의 생화학 무기인 사린가스를 살포해 14명이 죽고 수천 명이 다쳤습니다. 하루키는 이들 중 62명을 설득해 증언을 듣고 정리해 이 책을 썼습니다.

하루키는 비교적 자세히 이 책을 쓴 이유를 밝힙니다.

"어느 날 오후, 우연히 테이블 위에 놓인 잡지를 집어 들고 별생각 없이 페이지를 넘겼다.."

하루키는 어느 잡지에서 '지하철 사린 테러로 남편이 직장을 잃었다. 후유증으로 직장생활이 어려워졌는데, 처음엔 이해해주던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자 점점 싫은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는 사연을 보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사건에 휘말렸던 개인들의 삶과 그런 이들에게 오히려 상처를 주는 사회에 대해 알고 싶어진 것입니다. 그는 '피해자'라는 단어로 납작하게 놀려 뭉뚱그려져 있는 개개인의 삶을 복원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언더그라운드>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 하루키의 시선이 어느 곳을 향해 있는지를 귀띔해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상상이 아닌 팩트로만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리 능숙한 직업 소설가라도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야구선수가 축구까지 선수급으로 잘 하긴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어려운 일'을 하루키는 해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논픽션이지만 소설가 하루키의 작품세계를 구분짓는 결절지로도 평가됩니다.

이 작품에 영향을 받은 국내 기자들이 많습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 9주기 때 보도된 <3300일의 악몽>(한겨레21)이라는 특집기사를 쓴 기자는 "이 기사는 <언더그라운드>의 독후감이었다"고 말하곤 합니다.

올해 말까지 이어질 "모각하"에서 몇 년 전 사놓고 여전히 펴보지 못한 이 책을 읽어보려 합니다. 하루키를 리스펙하는 어느 기자에게 추천받았던 책입니다. 이 책이 거울처럼 반사하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자유롭게 나눠볼 기회가 있길 바랍니다.

크리스
@yoorak_coffee_roas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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