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시피값
2024.08.20  ·   by 크리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모각글" 홍보글입니다.

살다보면 분명 내가 앞서고 있었는데 문득 깨달아보니 상대보다 뒤쳐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가 있습니다. 썩 유쾌한 일은 아닐 겁니다. 아니, 분합니다. 생각만해도 얼굴이 찌그러집니다. 억울해 죽습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주체 못할 질투심이 꾸물꾸물 기어올라옵니다. 얼굴 하나가 머리에 스칩니다. "J"입니다. 네, 유락yoorak에 "뉴욕 매그놀리아 바나나푸딩 레시피"를 전수한, 바로 그 인물입니다.("유락에 바나나푸딩이 생겼습니다.", 6월18일자 글 참고)

지난 모각글 홍보글에서 "다음에는 제가 어떤 글을 좋아하는지 얘기해보겠다" 했습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J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네, 인정합니다. 저는 그의 글이 좋습니다. 정말 좋아합니다.

J의 방식은 남다릅니다. 하이에나입니다. 집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물고늘어집니다. 다른 사람들이 길어야 1주일쯤 다룰 주제를, 3개월에서 6개월, 길게는 1~2년씩 파고듭니다. 사람들은 J의 방식을 "논픽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내러티브 논픽션"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는 논픽션 작가입니다.

지금은 경로가 많이 달라졌지만 사실 J와는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했습니다. 10년 전쯤입니다. 그때는 제가 꽤나 앞서 나갔습니다. 종종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 뭔데 글을 이렇게 못쓰지..', '외국사람인가..?' 그가 알면 몹시 열받아 하겠지만 그의 글을 보며 종종 위안을 얻곤 했습니다. '이거랑 비교하면 그래도 내가 더..' 우쭐댔습니다.

그와의 "격차"를 알게된 것은 2년 전입니다. 그는 <대법원 서랍 속 국가폭력의 기록 224건>이라는 기사를 썼습니다.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주제입니다. 대법원이 스스로 과거사를 바로잡으려는 차원에서 만들었던 문건이 이 보도를 통해 16년 만에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완성도가 대단합니다. 베일 것 같은 날카로움이, 이 기사에는 담겨있습니다. 아름답다 느꼈습니다. 결말도 꽤 아름다웠습니다. 기사 안에 등장하는 억울한 아무개 중 일부는 이 기사를 통해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깨달아버렸습니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는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아, 이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겠구나, 저 멀리 가버렸구나 싶었습니다. 분노의 감정 이후엔 체념이 찾아옵니다. 이제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그가 이번에 책을 한 권 냈습니다. 이름이 조금 그렇습니다. <뽕의 계보>(팩트스토리X경향신문사). 이렇게 소개됩니다. "한국 작가가 발로 취재해 쓴 유일한 본격 마약범죄 논픽션!" 만 3년 동안 공을 들였습니다. 기획단계부터 "영상화" 노림수가 있었던 작품입니다. 영화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질투심이 다시 꿈틀댑니다. 부럽습니다.

이 글은 사실 레시피값입니다. 며칠 전 J에게 뜬금없이 연락이 왔습니다. 그는 종종 저의 대답이 뻔한데도 끊임없이 "장사 잘 되냐"고 물어옵니다. 그의 모든 관심사는 자신이 전수해준 바나나푸딩에 있습니다. 이번엔 "그 쿠키는 웬만하면 빼라", "싼 커피 맛 난다"며 푸딩 위에 가루로 올리던 커피과자를 빼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 쪽 레시피를 더 찾아봐라", "젤오 푸딩 맛을 바꿔봐라"고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J는 정확하게 제가 가고 싶었던 길을 가는 인물입니다. 그는 아마도, (어떤 형태로든) 세상을 바꿀 사람이 될 겁니다. 이제 그의 뒤를 따라잡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분노와 체념의 감정을, "모각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해소해보려 합니다. 글은 종종 합리화와 위로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다음 글에선 지금 구상 중인 "모각글" 방식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리스
@yoorak_coffee_roasters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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