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의 작업실, "중력"
2024.08.20  ·   by 크리스

B의 작업실에 초대받았습니다. B는 예술가입니다. 유락yoorak의 이웃입니다. 지난번 소개했듯, 스스로를 "비주류"로 정의합니다.

B도 그렇지만, 예술가와의 대화는 늘 흥미롭습니다. 낯설고 흔하지 않은 "영감"을 아낌없이 받습니다. 대화의 소재도 다양합니다. 오늘 대구 날씨처럼 사방팔방 널뜁니다. 시공간을 초월합니다.

이날 B와의 대화에서 얻은 인사이트는, "작품은 작가가 (혼자) 그리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고개를 갸웃하니 그가 말합니다.

"...흔히 '작가가 오로지 스스로의 육체와 의지만으로 그림을 그린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작품에 쓰이는 재료 대부분 그날그날의 기온과 습도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심지어 '중력'마저 그림에 영향을 미칩니다. 중력이 잡아당겨 불규칙하게 흘러내리는 흐름과 질감은 제 의사와 무관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B는 자연스레 류이치 사카모토의 suite for krug in 2008을 틀었습니다. "작업할 때 가장 많이 듣는 곡이자, 제일 좋아하는 곡"이라고 했습니다. 랜덤하게 틀어놓은 플레이리스트마저 붓놀림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습니다. 웅장한 곡이 흐를 때와, 잔잔한 곡이 흐를 때, 격정적인 곡이 흐를 때의 심경 변화, 그에 따른 작업의 전개는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얘기입니다.

문득, 유락yoorak 역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떠올려보면 이 브랜드와 관련한 거의 모든 것이 기획 의도와 무관하게 만들어지고, 또 흘러가고 있으니 말입니다.(예컨대 가오픈 때 유락은 인스타그램 계정이 없었습니다(!) 답답해하던 손님이 직접 만들어준 것(!!)입니다. 인스타그램을 이렇게 많이 활용하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어쩌면 "브랜드를 만든다"는 것은 오만한 발상일지도 모릅니다. 브랜드는 이를 소비하는 유저, 팬이 없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브랜드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혹은 "함께" 만들어가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얼마 전 <예사모임>에서 다른 가게 사장님들과 함께 읽은 책에서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브랜딩branding은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이다. 만들어 놓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동명사로 표현하는 것이다."

얼마 전 어느 손님께 이런 DM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레거시가 있는 예술계에 몸담고 있다가 뒤늦게 스스로 원하는 분야로 나섰다. 그런데 막상 나오고보니 이쪽도 저쪽도 아닌 이방인이 된 것 같아 몹시 괴로웠다. 우연히 B에 관한 글을 봤는데 B의 "주류가 된다는 것, 죽는 것이다."는 말을 보고 큰 용기를 얻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의도하지 않았던 위안慰安, 혹은 위로慰勞였으니 이런 것이 B가 말한 "중력"의 힘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여러 지점에서 이 브랜드를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집니다. 유락yoorak의 미래가 저 역시 흥미로운 까닭입니다.

크리스
@yoorak_coffee_roasters
안녕하세요!
작성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