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게이샤를 꺼냅니다.(2/2)
2024.12.29  ·   by 크리스

이것은 커피에 관한, 그제 밤 진행된 커핑(Cupping)에 관한 이야깁니다. 지난 4월, 유락yoorak 가오픈 때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네, 맞습니다. 기이했을 겁니다. 확실히 그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 분명합니다.

"신상카페"라는 곳이 메뉴라고 내놓은 건 단 2개. 6000원짜리 드립 커피와 3000원짜리 배치브루가 전부였고, 쥬스도, 디저트도 없었습니다. 인스타그램 계정이 없었던 것은 물론, 네이버나 카카오 지도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구차한 변명을 해보자면, 최초 구상은 유락이라는 프로덕트를 스타트업식으로 만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아주 조금씩, 조심스럽지만 정확하게 기능(?)을 더해가고 싶었습니다. IT프로덕트를 만들 땐 변수 차단이 핵심입니다. 변수가 많아지면 디버깅이 어렵습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뭐가 문젠지 파악이 어렵단 얘깁니다. 그러니 변수를 최소화해보자 가닥을 잡았고, 그 결과 이런 황당하기 짝이 없는 메뉴판이 나온 겁니다.

이런 마음도 있었습니다. 바닥부터 뒤집어엎는 공사만 5개월째. 더이상 여유 부릴 형편이 아니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모로 갔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만큼은 피해야 한다, 그러니 일단 부딪히고 조금씩 갖춰가자, 했던 겁니다. 말하자면 이 두 메뉴가 유락이라는 프로덕트의 출발점, 최소한의 MVP(Minimum Viable Product)였던 셈입니다.

믿는 구석이 아예 없진 않았습니다. 게이샤, 그것도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이샤'가 가진 내러티브가 역할을 해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 컵 안에서 신의 얼굴을 보았다!"...로 대변되는 에스메랄다 게이샤의 유구한 역사, 일반적인 판매가(1만2000~1만5000원)의 절반도 되지 않는 저렴한 가격(6000원)에서 일단 반은 먹고들어갈 거다 생각했습니다. 게이샤의 후광에 어떻게든 기대어보자 했던 겁니다.

아무튼 그렇게 한 달 넘게 버티다 결국 무릎이 꺾이고만 게이샤를 다시 꺼내려는 건, 다른 곳들처럼 디저트 시즌 메뉴 같은 게 따로 없는데 뭐라도 해야하는 것 아니냐, 가만 있어서야 되겠느냐는 위기의식의 발로가 첫번째이고, 두번째는 유락yoorak의 바탕이 되는 철학을 환기시키기 위함입니다.

커피씬을 좌지우지하는 게이샤가 원래부터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던 건 아닙니다. 1930년대 처음 발견되었지만 이후 60년 넘도록 아무에게도 관심받지 못했습니다. 재배 조건이 까다롭고 수확기간이 다른 커피에 비해 2배쯤 오래 걸리며 수확량이 매우 적었기 때문입니다. 푸대접만 받던 게이샤는 그러나 2000년대에 이르러 파나마 에스메랄다 농장을 통해 "신의 커피"라며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그냥 떨친 정도가 아니라 업계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버립니다. 유락yoorak이 내세우는 키워드는 재발견-재해석-재생산. 그와 썩 잘 어울리는 강렬한 스토리를 가진 커피인 셈입니다.

커핑 얘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원두는 로스팅 참고용으로, 커피플랜트 @_coffeeplant 가 진행한 이벤트에 응모해 받았던 겁니다. 이날 중점뒀던 건 '스토리를 배제하고 맛만 따지자' 였고, 다행히도(?) 맛은 하나 같이 훌륭했습니다. 게이샤 특유의 허브, 자스민, 오렌지 늬앙스가 두드러졌고, 화사하고 둥그스름한 단맛과 산미, 적절한 바디감, 식어도 무너지지 않는 구조감까지... 비싼 맛(?)의 향연이었습니다. 애초 맛(기능) 없이 스토리만 있다고 지금의 위상을 가지긴 어려웠을 겁니다.

이쯤되면 이 인간이 도대체 뭔 소리를 하려는 건가, 의아하실 겁니다. 모나리자니 스타트업이니 신의 커피니 구구절절 얘기를 늘어놓은 건 억지로라도 여러분이 앞으로 마시게 될 컵 한 잔에 스토리를 담으려는 나름의 시도입니다. 뭐가 먹힐지 몰라 마구 던져본 겁니다. 그냥 '비싸고 향이 특이한 커피 한 잔'이 아니라, 그중 뭐라도 이 커피와 연결돼 떠오르게 됐다면 작전 성공입니다. 이런 구구절절한 스토리가 이 커피가 원래 가진 이상으로 맛을 끌어올리고, 사람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 거라고 믿습니다. 그게 내러티브고 브랜딩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무튼 업사이클링 브랜드로서 유락이 하려는 게 이런 비슷한 것입니다. 조만간 출시될 에스메랄다 게이샤에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샘플 원두를 협찬(?)해주신 커피플랜트에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크리스
@yoorak_coffee_roasters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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