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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입맛대로 공개하는 기관들 / 본지, 92개 기관 1280건 공개 청구 / 청구 목적, 공개 고려 대상 아닌데도 ‘어디 쓸 거냐’‘소속 어디냐’ 집요 추궁 / 외부계약·예산사용 공개 원칙 불구 / 변호사 수임내역 공개 30곳에 불과 / 위원회 명단 공개 판례 있어도 무시 / 정보목록 개념 모르는 담당 수두룩 / 구체적 가이드라인 없어 ‘주먹구구’ / 자의적 공개 별다른 제재수단 없어
“당신 같은 일반인에겐 비공개가 아니라 부존재로 처리하겠다.” 대학생 A(21)씨가 지난해 정부에 세월호 참사 당일 세월호의 출항 교신 내용 관련 정보공개를 청구했을 때 담당 공무원한테 들은 말이다. ‘정보가 없다’는 취지의 부존재 처분이 내려지면 이의신청조차 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담당자는 ‘목적이 뭐냐’, ‘무슨 일을 하느냐’고 꼬치꼬치 캐묻기도 했다. 결국 A씨는 청구를 취하하는 대신 교신 내용 일부를 구두로 듣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A씨는 각국에서 발생한 항공사고를 분석하는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그래서 가끔 미국 연방수사국(FBI)에도 정보공개 청구를 한다. A씨는 “전 세계 누구에게나 정보를 제공하는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비공개가 기본이어서 하늘과 땅 차이”라며 “사고 수습 과정이 투명하다면 공개 못할 게 뭐가 있느냐”고 꼬집었다.
정보공개제도 시행 후 20년도 넘었지만 공공기관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받기란 여간해선 쉽지 않다. 조금이라도 민감한 정보는 알맹이를 쏙 빼놓기 일쑤다. 동일한 청구를 두고도 기관마다 해석과 적용 범위가 제각각이다. 전문가들은 “공무원의 자의적 정보공개에 대한 별다른 제재수단이 없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없어도 ‘공개’ 있어도 ‘비공개’
11일 세계일보 취재팀이 중앙행정부처와 지방자치단체, 시·도교육청 등 92개 공공기관을 상대로 1280여건의 정보공개 청구를 해서 확인한 실태는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간 언론 보도나 국회 국정감사, 법원 판례 등을 통해 공개돼 비교적 민감하지 않은 정보로 청구 대상을 좁혔음에도 기관들 반응은 천차만별이었다.
앞서 A씨가 겪은 것처럼 기관들은 조금이라도 문제 소지가 있을 것 같으면 전화로 “어디에 쓸 거냐”, “소속이 어디냐”고 집요하게 캐물었다. 정보공개 가이드라인에 ‘청구 목적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고 명시돼 있으나 현실은 딴판이다.
담당자들은 “학술이나 연구 목적이 아닌 경우 공개됐을 때 역효과가 우려된다”, “상부에 목적을 보고해야 결재를 받을 수 있다”, “상사가 궁금해한다” 등 이유를 댔다. 군 관련 정보를 요구했다가 담당자한테 “(청구인의) 나이를 보니 군대 다녀오셨을 것 같은데…”란 반응을 듣기도 했다.
공개 기준은 널뛰었다. 동일한 청구에 ‘정보공개법에 따라 공개한다’는 답변과 ‘정보공개법에 따라 비공개한다’는 답변이 동시에 돌아왔다. 변호사 수임내역(공개 30곳·부분공개 43곳·부존재 7곳·비공개 7곳·기타 5곳), 공무원 징계기록(공개 50곳·부분공개 27곳·부존재 3곳·비공개 2곳·기타 10곳), 광고비 집행내역(공개 64곳·부분공개 6곳·부존재 12곳·비공개 1곳·기타 9곳)에서 보듯 같은 정보를 놓고 기관마다 공개 정도가 달랐다.
그나마 공개 결정도 핵심은 쏙 뺀 ‘쭉정이’ 정보만 주고선 ‘공개’라고 하는 일이 다반사다. ‘연도별·월별 소속 공무원의 징계 현황’을 보면 92개 기관 중 고용노동부와 대검찰청·대통령 경호처·법무부·통일부·해양경찰청·행정안전부·환경부·경기교육청·국가인권위원회 등 12곳은 징계 대상자의 직급, 비위 내용 등 세부 사항은 전혀 없이 연도별 숫자만 죽 나열하고선 ‘공개’ 혹은 ‘부분공개’라고 밝혔다. 사실상 ‘비공개’나 마찬가지다.
일부 기관은 ‘없음을 공개한다’는 표현을 썼다. 정보가 없으면 ‘부존재’ 처리를 해야 하는데 ‘공개’로 처리했다. 일례로 법제처와 교육부 둘 다 2013∼2018년 기관장 특수활동비 내역이 없었지만 법제처는 ‘공개’, 교육부는 ‘부존재’로 각각 달리 통보했다.
일단 ‘공개’로 처리되면 청구인의 이의신청이 불가능해진다. 이 점을 이용해 ‘없음을 공개한다’는 식의 공개 통지를 하는 기관이 더러 있다. 기업 정보 등 예민한 정보의 청구일수록 ‘비공개의 공개’ 경향이 강했다. 변호사 수임내역 정보의 경우 ‘공개’ 처리한 30개 기관 중 관세청을 비롯한 5군데가 법무법인 이름을 가린 자료를 제공했고 3군데는 ‘없음’을 공개했다.
◆선례 있어도… “우리는 안 돼”
공공기관이 외부와 맺는 계약이나 예산 사용내역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공개가 원칙이다. 중앙행정심판위원회가 2015년 8월 공공기관의 변호사 수임료 내역과 관련해 “비밀로 보기 어렵다”며 공개 결정을 한 것도 이런 취지에서다. 이처럼 명확한 결정례가 있음에도 대부분 기관은 여전히 ‘재판에 관한 정보’라며 수임료 액수나 계약한 법무법인 이름 공개를 꺼렸다.
92개 기관 중 변호사 수임 내역을 대체로 공개한 곳은 36곳뿐이다. 그중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산업통상자원부·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인천시·충남도·전북도는 담당 변호사 이름까지 모두 공개했다. 반면 국세청·경찰청·국무조정실·금융위원회·조달청·방위사업청·국가정보원 등은 ‘해당 법무법인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등 이유로 비공개했다.
비공개 사유로는 ‘민감한 개인정보’나 ‘공정한 업무 수행 지장’을 주로 꼽았다. ‘기관 산하 위원회 명단’ 청구 결과를 보면 92개 기관 중 위원 이름과 직책을 모두 공개한 곳은 답변 기한을 연장하거나 다른 기관으로 이송한 14곳을 제외한 78곳 중 11곳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사생활의 비밀’ 등을 들어 공개를 거부했다.
이는 법원 판례와도 배치된다. 앞서 법원은 “위원 명단이 공개돼도 위원회가 업무 수행에 현저한 지장을 받는다고 보긴 어렵다”고 판시했다.
같은 기관 안에서 공개 범위가 다른 경우도 있다. 2017년 7월 발족한 소방청과 해양경찰청은 초과근무 현황과 변호사 수임 내역, 정보공개 처리 결과 등 청구에 대해 2017년 7월 이후 자료만 제공했다. 옛 국민안전처로부터의 분리·독립 등 조직 개편을 이유로 들었다.그런데 광고비 집행내역 등 자료는 조직 개편 이전인 2013년 이후 자료를 전부 제공했다. 정보공개가 ‘주먹구구’로 운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부 기관은 청구인한테 ‘수수료 폭탄’을 떠안겼다. ‘정보목록’을 공개한 기관 중 전남도는 유일하게 7만원 가까운 수수료를 부과했다. 행안부가 2017년부터 정보 접근성 향상을 위해 전자문서 제공 시 수수료를 없앴음에도 자체 조례에 수수료를 규정한 것이다. 경북도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다른 곳과 달리 ‘연도별·월별 정보공개 처리 결과’를 공개하며 각각 1만원 안팎의 수수료를 부과했다.
◆“이해도 높이고 유인책 만들어야”
이는 공공기관 종사자들의 정보공개 이해도가 전반적으로 낮은 것이 주된 원인이다. 심지어 정보공개법상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알리도록 돼 있는 정보목록의 개념조차 모르는 담당자가 허다했다. 한 공무원은 “그때그때 담당자들이 임기응변으로 처리하는 실정”이라며 “위에서도 ‘공개를 잘하라’고만 할 뿐 구체적 가이드라인은 없다”고 토로했다.
이렇다 보니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정보공개를 결정한 직원만 ‘독박’을 쓰는 부작용이 생겨난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조민지 사무국장은 “기관장 등 책임자들이 적극적 의지를 갖고 있지 않은 한 담당 공무원으로서는 공개에 다소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꼬집었다.
일부 공공기관의 ‘입맛대로’ 공개 관행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으나 입법까진 요원해 보인다. 알권리연구소 전진한 소장은 “기관들이 자기 마음대로 공개 여부를 결정하더라도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는 실정”이라며 “처벌조항 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달라진 게 없다”고 지적했다.
〈4〉 버려지는 의원 기록물 / 국회의원·의원실 관계자 대부분 / 기록관리 매뉴얼 존재조차 몰라 / “파쇄만 잘하면 된다고 배웠는데…” / 청문회 장관 후보자 사적 정보 담긴 / 문건도 세단기 안거치고 그냥 버려 / “안해도 되는데 번거롭게 왜 하겠나” / 법적 이관대상 아냐 수집 등에 애로 / 대통령 기록물처럼 특별법 필요성 / “의원들 기록관리 중요성 깨달아야”
‘쓰레기’ 더미 속에는 속지에 ‘반드시 파쇄하라’는 문구가 적힌 국방부 등의 문건이 다수 버려져 있었다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습니다.’
2016년 11월 국회기록보존소가 만든 ‘국회의원 기록관리 매뉴얼’ 첫 페이지에 적힌 문구다. 민주주의와 의정활동의 투명성, 업무 효율성 측면에서 기록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는 내용이다. 개개인이 하나의 독립 헌법기관인 국회의원 의정활동 기록은 기록 유산으로서 가치가 상당하다.
현실은 어떨까.
“기록 관리요? 파쇄만 잘 하면 된다고 배웠는데…” 31일 세계일보 기자들이 국회의원과 의원실 관계자들을 상대로 취재한 결과를 종합하면 대부분 해당 매뉴얼의 존재 자체를 모를 뿐더러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인식도 희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철저한 파쇄’가 거의 유일한 기록 관리 지침이었다.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특별법에 따라 매년 200만건 넘게 남겨지는 대통령 기록물과도 차이가 크다.
이와 관련해 그간 문제 제기가 끊이지 않았으나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국민 알권리는 물론 기록물관리 차원에서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한 의원실 관계자가 의원회관 지하 1층에 있는 세단실에서 각종 문서를 파쇄하고 있다
◆“안 해도 된다는데 누가 하겠어요?”
국회사무처가 관리해 비교적 잘 남겨지고 있는 국회 회의록과 달리 의원실에서 취급하는 문서들은 아무런 관리 체계가 없다. 심지어 같은 의원실에서 생산하는 문서도 작성 양식이 제각각이다. 보존기간이나 폐기 등 규칙은 사실상 전무하다. 행정부처를 대상으로 한 자료 요청 기록 등이 일부 시스템에 남긴 하지만 의원실 스스로 만들거나 외부로부터 받은 문서들은 남는 게 거의 없다.
현행 ‘국회기록물관리규칙’은 결재 및 보고·검토 문서와 회의록 등 관리 대상을 쭉 열거하면서 개별 의원 기록에 관한 내용은 뺐다. ‘그 밖에 국회도서관장이 국회 기록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는 기록물’이란 단서 조항이 있으나 실무에선 ‘무용지물’이다.
이런 현실은 취재팀이 확인한 ‘국회전자문서시스템 생산·접수 현황’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국회는 기록관리 및 활용을 위해 2004년 전자시스템을 도입했다. 19대 국회의 경우 이 시스템을 통해 국회사무처와 국회도서관이 각각 39만건과 10만건의 문서를, 예산정책처와 입법조사처가 각각 6만건과 4만건을 생산했다.
반면 의원실이 등록한 문서는 17대 국회 4454건을 시작으로 18대 7946건, 19대 8777건에 그쳤다. 현 20대 국회도 여태껏 등록된 게 6500건 정도다. 의원실별로 따지면 연 평균 7.6건 꼴이다. 의원실 관계자가 3000여명에 이르는 점을 감안하면 터무니없이 적다. 사소한 문서 하나라도 모두 남기게 돼 있는 행정부나 사법부와도 차이가 상당하다.
취재팀이 만난 의원실 관계자 20여명은 “(해당 시스템 존재를) 들어봤지만 직접 써본 적은 없다”고 입을 모았다. 한 비서관은 “사무처에서 정책개발비를 지원받아 만드는 것들은 기록물로 등록한다”면서도 “우리 의원실의 경우 귀찮아 그런 책자를 아예 안 만든다”고 귀띔했다. 또다른 비서관은 “의원실은 팩스로 공문이 오가는 시스템”이라며 “안 해도 되는데 누가 그걸 번거롭게 온라인에 다시 올리겠느냐”고 되물었다.
쓰레기 집하장에는 개인 신상정보가 포함된 인사 관련 문건 등 의원실 문서가 다수 발견됐다
◆마구 버려지는 의원 기록물들
“딱 두 가지예요. 개인정보가 있으면 파쇄, 없으면 쓰레기통이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의원 기록물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구 버려지고 있다. 취재팀이 최근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전후로 나흘간 의원회관과 본관 의원실 주변, 쓰레기 집하장 등을 살펴본 결과 각종 의정활동 자료가 매일 산더미처럼 버려지고 있었다.
‘대외비’라고 명시된 정책보고서를 비롯해 행정부처에서 받은 자료집과 국정감사 계획, 정치후원금 수납 기록, 공공기관 감사결과, 외부용역 보고서, 수사 관련 기록 등 문서가 5∼6시간 간격으로 청소 카트에 실려 나왔다. 의원회관 지하 4층 쓰레기장 구석에는 정책자료집 등 책자 수백권이 그야말로 산처럼 쌓였다.
인사청문회 날에는 장관 후보자와 그 가족의 주민등록번호 등 사적 정보가 포함된 문건들이 다수 발견됐다
인사청문회 당일은 장관 후보자와 그 가족의 주민등록번호 등 사적 정보가 담긴 문건이 다수 발견됐다. 이 ‘쓰레기’ 더미 속에는 심지어 국가정보원과 국방부 등이 의원실에 보낸 후보자 관련 문서들도 있었다. 일부 문건은 ‘(열람 후) 반드시 파쇄하라’는 문구가 표지 안쪽에 적혀 있었다. 기록물 담당 공무원이 모든 문서의 폐기 여부를 결정하는 일반 부처에선 상상도 못할 일들이다. 국회 기록물 관리 체계가 얼마나 엉망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10년 넘게 국회에 근무한 한 비서관은 “기록물 생산이나 보관은 전적으로 보좌진 몫”이라며 “‘잘 파쇄하라’는 것 이외엔 따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털어놨다. 15년 넘게 일했다는 다른 보좌관도 “기록물관리와 관련해 승진이나 인사 불이익 등이 전혀 없는데 누가 잘 하겠느냐”며 “그동안 이 문제를 지켜보기만 한 사무처나 도서관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꼬집었다.
한 청소노동자가 의원실에서 내놓은 각종 문서들을 카트에 실어 옮기고 있다
◆“의원 기록, 선의에만 맡겨선 안 돼”
그나마 의미가 있는 의원 기록물은 국회기록보존소 측에서 임기 말 불출마 또는 낙선 의원실로부터 넘겨받는 자료가 유일하다. 이마저 ‘기증’ 형식인 탓에 그다지 많은 양이 남겨지진 않고 있다.
취재팀이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입수한 ‘제19대 국회 의원기록물 수집 결과 보고’에 따르면 국회기록보존소는 19대 국회 마지막해인 2016년 3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 넉달간 의원회관을 비운 140여개 의원실을 상대로 기록물 수집활동을 벌였다. 담당 연구관 2명이 의원실을 방문해 기록물 기증제도를 설명하고 의사를 밝힌 의원과 협약을 맺은 다음 자료를 넘겨받았다.
그 결과 전체 146개 의원실 중 20곳(13.6%)만 기증 의사를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11명,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과 정의당이 각 3명, 국민의당(현 바른미래당) 2명, 무소속 1명이 157상자 분량의 기록물을 넘겼다. 4년간 활동한 19대 국회가 남긴 의정활동 자료치고는 너무 적어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나마 대다수 자료는 의원 자신한테 유리한 내용 위주로만 구성됐다. 보고서 역시 이 점을 지적하며 ‘의원기록물의 경우 법적 이관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법적·제도적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또 ‘수집업무 담당자가 2인에 불과해 체계적인 수집·정리에 어려움이 크다’고도 했다.
국회기록보존소 관계자는 “몇몇 의원의 적극적 협조 덕분에 일부 의미있는 기록이 국회 역사에 남을 수 있었다”면서도 “20대 국회가 어느 정도의 기록을 남길 것인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대통령기록물법 등 선례에 비춰 국회도 특별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편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조민지 사무국장은 “국회의원이 남긴 기록은 역사적으로 모두 가치있는 것들”이라며 “언제까지 의원들의 선의에만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지적했다.
의원회관 쓰레기 집하장 구석에는 정책자료집 등 각종 책자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러나 의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은 희박하다. 남겨진 기록물이 자칫 ‘부메랑’이 돼 의원 자신한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여당 소속 A의원은 “기록관리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라면서도 “법안을 발의하려 해도 당장 우리 당 의원들조차 설득할 자신이 없다”고 털어놨다.
이승휘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록은 결국 활용하려고 남기는 것이지만 현재로선 엄두도 못 내는 상황”이라며 “의원들이 기록관리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면 쉽게 바뀌지 않을 문제”라고 지적했다.
10개 중앙부처 정보공개 청구 / 기록물 숫자조차 모두 비공개 / 생산·해제·폐기 관리 ‘사각지대’ / 국가기록원의 통계마저 엉터리 / 盧정부 때보다 ‘알권리’ 뒷걸음
중요 국가기록 상당수가 사라져 ‘기록이 없는 나라’란 오명까지 들은 우리나라는 노무현정부를 거치며 큰 변화를 겪었다. 정부 차원에서 기록물관리에 적극 나서며 행정안전부 산하 국가기록원의 지위가 격상되고 대통령기록물관리법도 제정됐다.
접근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던 국가기관의 ‘비밀’이 국민 시야에 들어온 것 역시 그 무렵이다. 정부는 2006년 법 개정을 통해 공공기관들이 비밀의 생산 현황 등을 국가기록원에 통보하도록 의무화했다. 비밀기록물이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파악조차 되지 않는 ‘사각지대’라는 지적을 받아들인 결과다. 국민 알권리를 강조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의지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대다수 공공기관이 ‘관행’을 들어 비밀 생산 등 현황 공개를 꺼리는 것은 물론 국가기록원의 관련 통계마저 엉터리인 것으로 14일 세계일보 취재 결과 드러났다. 노무현정부를 계승해 ‘국민 알권리를 확대하겠다’고 한 문재인정부의 공언과 달리 달라진 점이 거의 없다는 게 현장의 시각이다. 전문가들은 특히 “각 기관의 비밀 폐기에 대한 감시가 불가능한 구조”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무조건 안 돼… 국가안보 모르세요?”
취재팀이 최근 감사원·경찰청·국방부·국가정보원·기획재정부·대검찰청·법무부·외교부·통일부·해양경찰청 10개 중앙부처에 연도별 비밀기록물의 생산·보유 현황 등의 정보공개를 청구한 결과 ‘공개’를 통보한 기관은 한 군데도 없었다. 모두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며 즉각 비공개 처리했다. 감사원만 “내부 검토를 더 해보겠다”며 한 차례 기한을 연장했다가 결국 비공개했다.
이유는 여러가지였다. A기관 관계자는 “비밀과 관련해선 (수치든 목록이든) 어떠한 것이라도 비공개가 원칙”이라며 “국정원 지침이 그렇다”고 선을 그었다. B기관은 “비밀 생산이나 폐기 현황 공개는 곧 기관의 역량 노출”이라며 “어느 해에 비밀이 많이 생산됐는지도 알려지면 (국가 차원에서) 좋을 게 없다”고 말했다.
물론 국가 기밀은 철저하게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비밀기록물 숫자를 국가안보와 직접 연결시키는 것은 과도한 ‘비밀주의’란 지적이 제기된다. 해당 수치를 국가기록원에 상세히 남기도록 한 법 취지와도 거리가 멀다.
기관 스스로 더 이상 비밀이 아니라고 판단해 비밀에서 해제한 기록물 숫자나 그 목록조차 감추는 건 알권리를 강조하는 정부 기조를 감안할 때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해 C기관은 “비밀을 해제한 것과 공개 여부는 다른 차원”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공개를 위해 따로 심의나 회의를 한 적이 있느냐’는 취재팀 질문에는 “없다. 관행적으로 공개될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고만 답했다.
이는 노무현정부 시절과 비교해 되레 후퇴한 모습이다. 2007년 세계일보는 비밀을 1건이라도 생산한 22개 중앙행정기관의 1998∼2006년 비밀기록물 생산 현황을 입수해 보도했다. 이듬해 통일부, 외교부 등은 시민단체의 정보공개 청구에 따라 과거 비밀이었다가 일반 기록으로 재분류한 목록 일부를 공개했다. 전진한 알권리연구소장은 “비밀 내용을 알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따져보면 공개 못할 이유가 없다”며 “각 기관들이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비밀 해제 목록은 (비공개이더라도) 제목을 가리거나 가명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등 법적 안전장치가 존재한다”며 “무조건적 비공개는 행정소송 대상”이라고 지적했다.
◆‘엉망진창’ 국가 비밀기록 통계
무조건 감추려고만 하니 국가의 비밀관리 체계에 대한 의구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에 취재팀은 국가기록원의 ‘중앙행정기관 기관별 비밀기록물 생산·보유 현황’을 입수해 확인했다. 이는 시민이 국가의 비밀 규모에 접근할 유일한 통로로 여겨진다.
분석 결과 법률에 근거한 국가 통계임에도 수치가 엉망인 것으로 드러났다. 예컨대 지난해 경찰청은 2017년 ‘1급 비밀’을 735건 생산했다고 통보했다. 통상 1급 비밀이란 전쟁처럼 국방과 외교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을 뜻한다. 정작 국방부는 최근 수년간 한 건도 만들지 않은 1급 비밀을 경찰청이 수백건 생산했다고 통보한 셈이다.
이에 경찰청은 “실무자의 착오인 듯하다”며 “숫자를 확인해 국가기록원에 다시 현황을 보내겠다”고 취재팀에 밝혀왔다.
비밀이 갑자기 폭증하거나 사라지기도 예사다. 외교부는 2013년까지 매년 비밀을 5000건 안팎 생산하다가 2014년 갑자기 2만2000건 넘는 비밀을 생산한 것으로 돼있다. 그런데 외교부가 2014년 국가기록원에 통보한 비밀 보유 현황은 2013년의 6만4612건보다 74% 줄어든 1만7145건에 그쳤다. 비밀 생산은 폭증했는데 보유 수치는 되레 줄었다는 것으로 이해가 쉽지 않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2012년 51건이었던 비밀 보유 현황이 2013년 4098건, 2014년 8370건으로 크게 늘었으나 2012년과 2013년 비밀 생산은 각각 498건, 470건에 불과했다. 해양경찰청은 2011년부터 2013년까지 각각 180건, 2332건, 168건 생산했다고 통보했다.
미통보는 물론 잘못 기재한 사례도 눈에 띈다. 방위사업청은 2013, 2014년 통계를 보면 6개 항목 현황이 한 자리 숫자까지 전부 똑같아 오기로 의심된다. 경찰청은 유독 2013년만 전체 비밀 현황이 모두 ‘없음(-)’으로 돼 있다. 다른 기관들 중에도 현황이 연도별로 몇 군데씩 빠진 곳이 있다. 취재팀의 문의에 국방부 등 일부 기관은 “(대외비를 포함한) 비밀기록물 생산이 그렇게 적을 리 없다”며 되레 의문을 나타내기도 했다.
국가기록원 관계자는 “딱히 강제할 근거가 없다 보니 (통계가 의심스러워도) 기관에서 알려주는 대로 기록할 수밖에 없다”며 “내부적으로 회의적 시각이 많다”고 털어놨다. 행안부령으로 정해진 통보 서식은 비밀기록물 목록을 일일이 쓰도록 돼 있으나 연간 10건 안팎을 생산하는 일부 기관을 빼면 제대로 목록을 보낸 기관이 없다는 점도 취재 결과 확인됐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걸까. 전문가들은 비밀담당 부서와 기록관리 부서가 분리돼 있고 서로 동등한 지위가 아니란 점에서 원인을 찾는다. 앞선 취재팀의 정보공개 청구에 대해 비밀담당 부서들은 “각 부서별로 생산 현황을 다시 취합해야 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판에 박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 법으로 규정된 비밀 목록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 기록관리 담당자는 “(비밀담당 부서와 협의 없이) 전산망을 검색해 나온 수치를 국가기록원에 통보하는 식”이라며 “모든 비밀 목록을 만들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정진임 소장은 “비밀기록 통계 무용론은 오래전부터 나오던 얘기”라며 “이런 비밀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각 기관이 생산한 비밀들이 어떠한 감시나 기록 없이 자체 파기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교문서처럼 비밀도 공개해야…”
일각에서는 국가안보와 직결된 외교문서의 공개를 들어 국정원 등 정보기관을 포함한 국가 비밀문서들도 모두 공개돼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정부는 1994년부터 매년 외교부령에 따라 생산 후 30년이 경과한 외교문서를 심의해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전두환정부 시절인 1987년 11월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 주범 김현희를 같은 해 12월 대선 전 한국으로 데려오려고 안간힘을 썼다는 점이 최근 알려진 것이 대표적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국민 알권리를 위해 외교문서들을 공개하는데 그 비율이 88% 안팎”이라며 “심의에서 비공개 결정이 나더라도 5년 뒤 재심의하게 돼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중앙정보국(CIA) 등이 생산한 비밀 문서라도 30년가량 지나면 엄정한 심의를 거쳐 전 세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온라인에 공개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런 제도가 전무하다.
김익한 교수는 “세계적으로 보면 ‘생산 후 30년’을 기준 삼아 비밀기록물을 공개하는 추세”라며 “직접 활용도 가치가 있지만 이렇게 공개 절차를 마련해두면 기관들의 비밀기록물 무단 폐기와 부실 관리에 경각심을 주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7〉 반복되는 기록물 무단 파기 / 수사기관·법원 ‘공식 결재’ 기준 삼아 / 국가기록원은 “모든 공적 기록 해당” / 水公, 4대강 문건 등 16t분량 문건 파기 / “혐의 적용 다툼 소지”… 수사 흐지부지 / 기록 사라지면 국민 알권리에 치명적 / “국가기록원 감사 권한 확대” 목소리
#1. 2016년 10월 이철성 당시 경찰청장은 국회 국정감사에서 농민 백남기씨가 경찰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2015년의 민중총궐기 당일 상황 보고서에 대해 “이미 파기해 없다”고 밝혔다. 시민단체가 “경찰의 책임 여부를 가릴 중요 공공기록물을 무단 파기했다”며 이 청장 등을 고발했으나 검찰은 ‘무혐의’로 종결했다. 담당 검사는 고발인을 불러다놓고 “그럼 여기(사무실)에 있는 문서 모두 공공기록물이냐”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2. 지난해 10월 인천시는 공공기록물을 무더기로 내다버렸다는 의혹과 관련해 행정안전부 산하 국가기록원의 특별점검을 받았다. 점검 결과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 신상정보가 담긴 원본 기록물 다수가 법에 정해진 심의 절차도 안 거치고 버려진 사실이 확인됐다. 그럼에도 징계는 한 건도 없었다. 인천시는 “(공교롭게도) 쓰레기장 근처에 폐쇄회로(CC)TV가 없어 누가 기록물을 버렸는지 특정할 수 없다”고 이유를 밝혔다.
‘기록물을 무단 파기한 자는 7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현재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 김대중정부 시절인 1999년 국회가 공공기록물 관리법을 만들 때 가장 공들인 부분이 바로 형사처벌 조항이다. 기록물 관리의 엄중함을 일깨우고 주먹구구식 파기를 막으려면 ‘일벌백계’가 필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초 취지와 달리 이 조항으로 처벌된 사례는 거의 없다. 28일 세계일보 취재팀이 언론 보도와 국정감사 자료, 국가기록원 문건 등을 토대로 최근 10여년 동안 발생한 공공기관의 기록물 무단파기 40여건에 대한 후속조치를 점검한 결과 대부분 경징계나 주의 선에서 마무리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경향이 기록물 무단파기의 반복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 지적이다.
◆처벌 조항은 ‘있으나 마나’
취재팀이 대법원을 통해 확인한 결과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간 공공기록물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건은 7건에 불과했다. 그나마 대부분 기소유예나 무죄 선고가 났다. 2014년 2건만 벌금형에 처해졌는데, 기록물 ‘파기’가 아닌 ‘유출’ 사유였다. 그간 공공기록물법 위반 사례가 언론에 여러 차례 보도된 점을 감안하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대목이다.
실제로 무단 파기 처벌 조항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2017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당시 불거진 ‘면세점 선정 비리’ 의혹이 대표적이다. 감사원 감사에서 2016년 6∼10월 천홍욱 당시 관세청장을 중심으로 면세점 심사 관련 자료를 조직적으로 없앤 정황이 드러났다. 감사원에 따르면 천 전 청장은 국회로부터 면세점 업체의 사업계획서 등 제출을 요구받자 “(고발당할 수 있으니) 아예 보유하지 않았던 것으로 하자”며 반환을 지시했고, 탈락 업체 사업계획서는 폐기됐다. “국회가 요구해도 제출하지 않는 게 좋겠다”, “보관하고 있으면 국회법에 따라 제출해야 한다”는 등의 보고를 받고 나서다.
감사원은 “자료 파기로 면세점 사업자 선정이 투명하게 이뤄졌는지 확인할 수 없게 됐다”며 공공기록물법 위반 혐의로 천 전 청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지난해 7월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혐의’ 종결됐다. 기록물 파기에 연루된 공무원 2명도 견책, 경고 등 경징계를 받는 데 그쳤다. 결국 아무도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은 셈이다.
지난해 1월 한국수자원공사는 폐지업체를 통해 16t 분량 기록물을 무단 파기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었다. 쓰레기더미 속에서 302건의 원본 기록물이 발견됐으며, 거기엔 4대강 관련 문건도 40건이나 포함돼 있었다. 국토교통부는 “무관용 원칙을 적용하겠다”며 이학수 수자원공사 사장을 고발 조치했다.
하지만 수사는 지지부진해 검찰 송치는커녕 이 사장이 참고인 조사만 한 번 받은 게 전부다. 경찰 관계자는 “검찰에 송치하려 했으나 ‘보완수사’ 지휘가 내려왔다”며 “혐의 적용에 다툼이 있다고 본 듯하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사회적 파장이 컸던 감사원의 한국농어촌공사 쌀직불금 부정수급 의심자 명단 폐기(2008), 대전지법의 재판기록 1500쪽 파기 의혹(2009), 경찰청의 교육감 후보자 성향 조사 기록 폐기(2011) 등 사건도 아무 처벌이 없었다. 취재팀이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입수한 국가기록원의 ‘공공기록물 무단 파기 인지 내역’에 오른 34건도 대부분 ‘주의·훈계 요구’나 ‘시정 요청’ 선에서 마무리된 것으로 확인됐다.
◆협소한 정의·온정주의의 작용
왜 처벌 조항이 작동되지 않는 걸까. 이유는 여러 가지로 분석된다. 우선 수사기관이 공공기록물 범위를 협소하게 해석하는 점이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국가기록원이나 시민단체는 법에 명시된 것처럼 ‘공무원이 업무와 관련해 만든 모든 형태의 기록정보’를 공공기록물로 봐야 한다고 여기지만, 수사기관이나 법원은 공식적인 결재나 시스템 등록 등 절차가 전제돼야만 공공기록물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관련 수사 경험이 있는 한 검찰 관계자는 “공무원이 공공기록물을 무단 파기했다면 당연히 처벌을 받는다”면서도 “공공기록물 사건의 경우 그 범위에 있어 법리적으로 다툼의 소지가 있는 게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2010년 12월 검찰이 상지대 옛 재단 이사장 복귀 관련 속기록 무단파기 사건을 ‘각하’ 처분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속기록은 법리상 공공기록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청와대에서 김태우 전 민정수석실 특별감찰반원이 작성한 첩보보고서를 파기한 사건과 관련해 ‘공공기록물 무단 파기’란 주장과 ‘첩보보고서는 공문서가 아니다’란 주장이 맞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수사 경험이 풍부한 경찰의 한 관계자는 “(무단 파기는) 외부에서 알아차리기 힘든 범죄 유형”이라며 “수사 경험이 있는 사람도 드물고 기소도 잘 안 돼 참고할 선례가 딱히 없는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무단 파기로 적발되더라도 기관들이 해당 공무원의 해명을 받아들여 눈감아주는 일도 적지 않다. ‘고의가 아니라는데 굳이 형사처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일종의 온정주의가 작용하는 것이다. 전진한 알권리연구소장은 “여태껏 기록물 무단 파기로 기소되는 일이 거의 없었던 건 수사 주체와 대상이 둘 다 공무원이란 점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며 “관행이라거나 실수였다고 하면 대체로 넘어가주는 분위기로 보이는데, 기록관리 측면에서 상당한 문제”라고 꼬집었다.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가에서 녹을 받는 공무원이 업무에 활용하고자 만든 자료라면 (등록되지 않았더라도) 공공기록물로 볼 수 있다”며 “기록물이 파기되면 투명성 확보나 권력 감시는 물론 후대의 역사적 평가도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월 국가기록원 관계자들이 ‘4대강 자료 파기 의혹’이 불거진 한국수자원공사 대전 본사를 찾아가 폐기 문서를 회수하고 있다. 조사 결과 300여건의 원본 기록물이 별다른 절차나 심의 없이 버려진 것으로 드러났다. 자료사진
◆“국가기록원 권한부터 넓혀야”
전문가들은 과거 잘못을 감출 목적에서 기록물을 없앤 사례가 많았다는 점을 들어 정부가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법 취지에 맞춰 형사사법당국이 기록물 무단 파기 사건을 더 엄정하게 다뤄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승휘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원에서 한두 번 중형이 나오면 공무원들이 기록물을 무단 파기하는 사례가 많겠느냐”며 “철저한 기록관리 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국가기록원을 중심으로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공공기록을 총괄하는 국가기록원의 감사 권한을 보다 넓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현재는 국가기록원이 언론 보도나 감사원 감사 등을 계기로 기관들의 무단 파기 사례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물밑에서 얼마나 많은 무단 파기가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이 힘든 구조란 얘기다. 한 정부 관계자는 “미국은 우리와 달리 국가기록관리청장에게 (감사와 관련한) 충분한 권한을 법적으로 부여하고 있다”며 “국가기록원이 매년 실태를 평가하고는 있으나 뚜렷한 법적 근거가 없는 데다 행안부 산하기관이란 낮은 위상 때문에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긴 역부족”이라고 말했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조민지 사무국장은 “기록이 사라지면 정보공개 청구도 불가능해진다는 점에서 무단 파기는 국민 알권리에 치명적”이라며 “정부 차원에서 의지를 갖고 꾸준히 관심을 가져야만 근절될 수 있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 전자문서 시대… 복원 불가능한 ‘디가우징’ 논란
공공기관들이 업무를 전자문서로 처리하는 사례가 늘면서 이른바 ‘디가우징’(Degaussing)을 통한 기록물 삭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디가우징은 ‘디가우저’란 장치를 이용해 강력한 자력으로 컴퓨터 하드디스크 정보를 파기, 복구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기술을 뜻한다.
지난해 6월 법원행정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재직 당시 쓴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2017년 10월 디가우징 처리됐다고 밝혔다. 법원 측은 “대법관급 이상 간부가 사용한 컴퓨터는 직무 특성상 임의로 재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퇴임 시 폐기가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 시절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제기된 상황에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디가우징 시점이 마침 일선 판사들의 의혹 제기에 따른 2차 조사를 목전에 둔 때였다는 점도 의구심을 키웠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곧장 논평을 내고 “대법원 ‘전산장비운영관리지침’ 어디에도 대법관 이상이 사용하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완전히 소거 조치해야 한다는 명확한 규정은 없다”며 “대법원이 내부 지침에 따라 하드디스크를 소거했더라도 하드디스크 안에 저장된 전자문서 등 기록물을 무단으로 파기한 행위는 공공기록물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검찰 수사에 대비해 법원 스스로 불리할 수 있는 자료를 복구 불능으로 만든 것이란 의심이 담겨 있다.
디가우징은 2008년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이 불거졌을 때 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 직원들이 증거인멸에 활용하며 널리 알려졌다. 2013년 국가정보원 정치 댓글 의혹 사건에서도 경찰 수뇌부가 검찰의 압수수색 직전 관용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디가우징해 논란이 됐다. 주로 기관들이 자기네한테 불리한 정보를 감추는 용도로 쓴 셈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전자정부법 또는 공공기록물법 위반 소지가 크다고 지적한다. 반면 법조계는 해당 하드디스크에 어떤 기록이 남아 있는지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단순히 ‘복구 불가능화’ 작업을 한 것만 갖고 처벌하긴 어렵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탐사기획 - 알권리는 우리의 삶이다> 시리즈(총 10화)에 실린 기사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