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국가 북한(2013)
2024.07.21  ·   by 크리스

영원히 지속되는 연극은 없다, 그러나

상식을 파괴하는 이상한 나라

질문을 하나 해보자. ‘인간이 고기를 먹는 것은 자연의 섭리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인가.’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해 정확하게 그 이유를 모르더라도 살아온 경험과 느낌 상, 아마 ‘그렇다’라고 말할 가능성이 크다. 진화 생물학, 문화인류학, 역사학 등 다방면의 연구에서도 인간이 오랫동안 육식을 해온 것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설명한다. 맛이라는 질적 차원을 떠나, 고기가 지닌 풍부한 단백질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필수아미노산과 비타민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은 고기를 좋아하도록 생물학적으로 설계되어왔고, 그러하도록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상식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몇 년 전 열 댓 명 남짓한 탈북동포 아이들을 만난 뒤로 이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달라졌다. 금강학교는 중국을 통해 전향한 새터민 중 아이들을 키울 여력이 없는 부모들이 맡긴 아이들을 돌보는 일종의 교육시설인데, 지인의 권유로 우연찮게 아이들 식사를 만들어주는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여러 가지 기억들이 있지만, 그때 내게 인상적이었던 모습은 눈앞에 차려진 ‘맛있는’ 고기가 아닌, 날 때부터 먹어온 간장과 김을 찾는 네댓 살의 아이들이었다. 물론 몇몇 아이들은 처음부터 고기를 잘 먹었지만, 몇몇의 아이들에게 고기를 제대로 먹이기까지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인간은 ‘본래부터’ 고기를 선호하도록 설계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실제로 겪은 경험의 세계가 아닌, 이론과 권위가 만든 ‘상식’의 세계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다시 말해, 나를 둘러싼 것들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실제 그것이 어떠하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설명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북한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비슷한 문제를 종종 엿볼 수 있다. 사실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는 대답하기 무척 어렵다.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다차원적이고 복잡한 이해관계가 묻어있다. 대개 북한에 대한 이해는 우리사회에서 ‘전문가’들로 불리는 권위에 의해 설명되는데, 이러한 권위는 북한 사회의 왜곡과 억압, 부조리한 권력구조, 정치경제적 취약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북한은 왜곡과 부조리, 체제의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동안 흔들림 없이 그 자신의 색깔을 견고히 유지하고 있다.​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봐도 북한은 ‘비상식적인’ 국가다. 91년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20세기 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된 거대한 공산주의 실험이 종료되고 대부분 동구권 국가들은 시장체제를 수용하고 경제를 개방하였다. 그러나 수 십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북한은 여전히 폐쇄적인 성격의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세계화와 국제화가 생존의 핵심인 현대사회에서 이렇게 폐쇄적인 성격을 유지하면서도 국가 경제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당장 이해하기 쉽지 않다. 심지어 얼마 전 쿠바조차 59년 만에 미국과의 빗장을 열었다.

정치적으로도 큰 저항과 위기 없이 일당, 일인독재가 삼대에 걸쳐, 반세기 넘게 이어져 왔다는 것 또한 상식 밖이다. 공산주의 대표격인 소련에서도 53년 스탈린 사후, 스탈린 독재체제에 대한 반성과 탈스탈린화에 대한 요구가 흐루시쵸프를 중심으로 사회 기득권층에서부터 인민대중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일어난 바 있다. 중국에서도 등소평이 ‘모택동 신화화’에 대한 비판과 실용주의 노선 천명으로 권력의 중심부에 설 수 있었다. 이렇듯 공산사회에서도 독재에 대한 날선 비판은 권력의 재구성 상황에 항상 존재해왔다. 그러나 북한의 권력 세습과정을 살펴보면, 이전 권력에 대한 비판과 반성은커녕 죽은 권력자에 대한 신격화와 정당성을 강화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것은 일종의 ‘종교’라고 불러도 무방할 수준이었다.

북한은 ‘북한’이다

특히 북한은 90년대 중반, 아사자가 속출하는 지독한 경제난 속에서도 독재에 대한 인민 대중의 집단행동이나 저항이 없었는데, 이 또한 경험적 사실들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역사적으로 중앙 권력의 해체와 독재체제의 붕괴는 경제위기에서 촉발되는 경우가 많았다. 구소련의 붕괴 역시 80년대 경제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특히 막스 베버가 지적했듯,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모든 카리스마 권력은 종국에 해체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역사적인 경제난이 오히려 ‘죽은’ 카리스마마저 되살려내는 지렛대 역할을 했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공산당 위원장 염상진은 공산주의를 ‘쌀밥에 고깃국 먹는 세상’으로 설명하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한다. 그것이 배고픈 인민에게 공산주의가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현재 북한은 쌀밥과 고깃국은커녕 강냉이죽 한 그릇도 제때 줄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공산주의 체제는 별다른 저항 없이 유지되고 있다.

여러모로 북한은 상식의 세계에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비상식적인’ 나라다. 그러나 북한은 현실세계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특유의 독재 정치의 생명력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북한 사회는 기존의 경험적 사실과 권위적 설명에서 이탈된 특이한 케이스다. 따라서 우리는 북한을 이해하기 위해 기존의 권위와 상식을 탈피한 접근법이 필요하다. 유사한 상황과 맥락의 국가 간 비교를 통해 북한 체제를 이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보편성을 비웃는 북한 체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을 ‘북한’ 그 자체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 책 ‘극장국가 북한’은 북한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모습으로 분석한다. 북한 특유의 정치와 문화, 카리스마 권력의 세습, 그리고 동원 체제를 인류학자 C. 기어츠(Clifford Geertz)가 제시한 개념인 ‘극장국가’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 또 보편성에서 이탈한 북한의 모습을 카리스마 권력이 어떻게 대중으로 하여금 진정한 복종을 이끌어 냈는지 통찰력 있게 짚어낸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북한은 가장 불가사의한 곳이라고 일컬어지지만, 실제로 북한 정치체제에는 미스터리가 없다.” 즉, 북한은 북한일 뿐이라는 것이다. 북한은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아니며 그랬던 적도 없다. 단지 카리스마 권력이 다양한 기술을 통해 대중을 교묘하게 지배하고 있을 뿐이다.

중세 기독교의 오마주: 쌍권총을 짊어진 김일성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중세 가톨릭 이야기다. 보통 서양의 중세를 게르만족에 의해 서로마가 멸망한 476년부터 비잔티움 제국이 투르크에 의해 무너진 1453년까지 보는데, 이 시기는 서구 예술의 역사에 있어서 그야말로 ‘암흑기’였다. 예술이 드러내는 가치와 철학, 시대상이 역사를 설명하는 중요한 축이라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천년 중세 동안 만들어진 거의 모든 예술의 주제는 오로지 ‘신’이었고, 중세는 곧 신만이 존재하는 시대였다. 회화를 비롯해, 음악, 건축 양식 등 모든 예술은 가톨릭 교리에 근거해 제작되었다. 신앙심을 주제로 한 경건함과 엄격함으로 대표되는 단조로움이 특징이다. 원근법과 같은 기교, 인간을 주제로 한 그림은 르네상스에 이르러서야 세상에 등장하게 된다. 다양한 통로를 통해 수없이 반복 생산된 가톨릭 신에 대한 이야기는 대중의 모든 사고회로를 지배했고, 인민의 완벽한 복종을 이끌어 냈다.​

중세는 신을 중심축으로 모든 것이 구성됐다. 비단 예술뿐 아니라, 철학을 비롯해 과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성은 신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신에 대한 맹목적 추종은 심지어 실재하는 현실세계를 왜곡시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초신성은 별이 소멸하면서 생긴 에너지 폭발로 평소보다 수 만 배 밝아지는 현상인데, 육안으로 뚜렷이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중세 유럽의 어느 기록에서도 초신성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시기 중국의 기록에 꼼꼼하게 적혀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는 중세 유럽을 지배한 종교적 믿음 때문이었다. ‘우주는 완벽하고 완전하다’는 신이 창조한 무결한 세계에 대한 믿음은 실재하는 현실을 왜곡해 인식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서양 중세의 중심축이 카톨릭의 신이었다면, 북한 사회의 중심축은 단연코 김일성이다. 북한이 자랑하는 대중예술과 사회문화, 인문, 철학 사상은 모두 하나의 카리스마적 권위, 즉 김일성을 중심으로 우주적 궤도를 형성하고 있다.

김일성 탄생 90주년 기념으로 2002년에 제작된 대집단 체조, ‘아리랑 공연’은 김일성 신격화하는 대중예술의 상징이다. 총 출연 10만 명에 달하는 대집단체조의 스펙타클은 모두 김일성과 그를 잇는 후계자 김정일의 위대함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식민지 만주에서의 비극으로 시작되는 공연은 이를 극복한 김일성의 지도력과 군사적 천재성을 강조하고, 김일성의 유지를 받든 김정일이 전세계적 사회주의혁명의 위기에서 민족을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지도자임을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시나리오는 아리랑 공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북한 대중예술의 대부분 스토리는 일제시대 만주에서 겪은 지도자 김일성의 고난으로 시작해서 이를 극복한 김일성의 위대함으로 귀결된다. 이는 중세의 모든 인민대중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배한 가톨릭이 예술을 통해 신앙을 대중에게 주입했던 서사구조와 꼭 닮아 있다. 초월적 개인의 역경과 극복, 그리고 종국에 이르러 ‘구원’으로 귀결되는 신화적 코드는 예술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집단사고를 완벽히 지배했다. 예수와 김일성의 다른 점이라면, 예수는 십자가를 짊어졌고 김일성은 두 자루의 쌍권총을 짊어졌다는 것뿐이다.

극장의 장막 뒤에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존엄을 예술이라는 도구를 통해 끝없이 생산해 대중에게 주입하는 구조는 현대성을 거부하는 북한 정치문화의 핵심이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도구로써의 예술의 모습이 아니라, 역사를 정치적 의도를 바탕으로 전략적으로 재구성해냄으로써 통치 기반을 마련하는 정치적 기술이다. 북한의 지배적 예술이론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이념적으로 올바르고 도덕적으로 활기차게 재현해내는 것이다. 특히 국가지도자들의 전기적 이력과 연관될 때는 그 주체의 천재성과 도덕적 권위가 생동감 있게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현실의 고증보다 대중들의 도덕, 정치의식을 높이는데 있다고 공공연히 주장한다. 즉, 의식을 개조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는 권력이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법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고 보았다. 전통적인 질서 속에서 세습을 통한 권력, ‘주술의 정원으로부터 탈피한’ 인간의 합리성과 법적근거에 기초한 권력, 그리고 카리스마적 권력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권력의 원천을 살펴보면 세습적 권력은 국가에 의해 이미 독점된 폭력에 의해 구성되고, 합리성과 법에 근거한 권력은 인간의 이성적 측면에, 카리스마 권력은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감성적 측면에 호소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폭력과 합리성, 감성이 권력을 정당화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북한의 권력구조를 카리스마 권력의 세습이라는 단일한 차원에 집중해 설명하고 있다. 영속적인 카리스마의 추구가 북한의 독특한 세습방식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기반으로 혁명적 카리스마의 관례화(routinization)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무엇보다도 국가창시자의 카리스마적이며 구세주적인 권위의 역사적 생명 보존이 현재의 특수한 북한 정치 환경을 빚어낸 핵심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카리스마 권력이 북한체제를 작동하게 하는 기본 엔진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북한이라는 극장의 장막 뒤에 인간을 지배하는 세 가지 코드가 모두 숨어있다고 본다. 엄격한 사회주의 국가 북한에서 ‘총대’로 상징되는 폭력은 권력 세습 과정의 표면적 이유를 정당화하고, ‘과학적’으로 무장한 주체사상은 대중의 합리성을 지배한다. 마지막으로 김일성이라는 초월적이고 신성화된 개인에 대한 대중적 그리움은 인민 대중의 감성 코드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북한체제는 이 세 가지 통치 기제를 뒤섞어 다양한 통로를 통해 끊임없이 인민에게 유통하고 있다. 세 가지 권력의 원천의 적절한 배치가 역대 그 어느 정권보다 견고한 정당성을 확보하게 한 핵심이다.

그리움이라는 화폭에 그린 ‘고난의 행군’

역사적으로 폭력에 의한 통치는 그 수명이 짧았다. 중국사를 돌이켜보면, 강력한 무력을 앞세운 몽고의 지배는 화려했을지언정 순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유교라는 사상적 무기를 지닌 한족의 중국대륙에 대한 지배는 오늘날까지 영원하다. 이렇듯 이성에 대한 복종은 피지배계층으로 하여금 무한한 굴종을 이끌어낸다. 지난날 북한이 보여준 정치적 기술은 대중의 이성의 영역을 자극해 복종을 이끌어내었다.​

94년, 김일성 사후 겪은 기록적인 경제난인 ‘고난의 행군’은 종종 미스터리로 치부되곤 한다. 도미노처럼 무너진 동구 공산동맹과 외교적으로 고립된 국제정세 속에서 그동안 지배를 정당화했던 카리스마 김일성의 죽음이라는 정치적 위기, 또 자연재해에서 비롯된 식량 부족이라는 경제적 위기는 북한 정권에 있어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위태로운 상황에서 세습권력이 별 무리 없이 김정일에게 승계되었다. 세계가 주목한 일련의 사건이었다. 권력 세습의 미스터리를 저자인 권헌익과 정병호는 북한이 구사하고 있는 대중의 정신을 지배하는 교묘한 기술을 바탕으로 설명한다.​

​북한은 초월적 권위인 김일성의 죽음을 ‘그리움’이라는 감정적 요소를 자극해 극복해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만든 그리움이라는 정치적 화폭에서 김일성이라는 종교적 상징을 되새기고 그의 유지를 잇는 김정일을 충효와 인민을 상징하는 주체로 그려내고 있다. ‘아버지’ 김일성의 죽음 앞에서 북한이라는 가족국가의 모든 구성원은 헌신을 강요받았고, 이는 한낱 경제위기나 기근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될 신성한 것이었다. 인간 이성의 복종은 피폐한 현실마저 수긍하게 만들어 모순된 현실세계 속에서도 무한한 굴종을 이끌어냈다.​

​심각한 기근임에도 94년부터 98년까지 이어진 금수산기념궁전 건설, 김일성기념단지 고속도로 건설, 조선로동당창건기념탑, 고조선과 고구려, 고려왕조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대규모 역사기념물 조성 등은 북한사회를 비롯한 극장국가들이 보여 온 ‘과시 정치’의 전형을 드러낸다. 이러한 과시적 정치는 상실된 카리스마 권력에 대한 그리움과 효성을 새로운 권력에 대한 충성의 원리로 바꾸어낼 수 있었던 핵심이었다.

막이 내리길 기대하는 관객들

우리 사회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태도는 매우 복잡하고 다분히 모순적이다. ‘적’이라는 원시적인 감정과 ‘거래대상’이라는 계산 논리, 그리고 주변 열강과 맞설 ‘미래 공동체’라는 인식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북한정권을 우호적으로 보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북한을 바라보는 입장에 관계없이 북한이라는 체제가 지닌 제도적 부조리와 왜곡된 질서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사실이다.​

김일성 사후, 선군시대 북한은 긍지에 찬 유격대국가이지만, 실패한 가족국가이기도 하다. 저항하지 않는 인민 대중의 무능력은 차치하고서라도, 최고 권력을 가족이라는 개념에 대입시켜 복종을 이끌어냈다면, 가장으로서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은 국가권력이 행할 최소한의 의무이자 책무다. 북한정권은 이미 실패한 가장인 것이다. 더군다나 북한 지도층의 호화로운 삶과 피폐한 북한 주민의 삶의 극명한 대비는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한때 북한 이슈로 먹고살던 종편에 종종 등장하는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부분도 바로 이 대목이다. 이들에게 북한은 존재자체가 모순인, 언젠가 쉽게 무너져 버릴 불온세력이다.​

​특히 전쟁 이후 있었던 체제 경쟁과 단절된 지형 속에서 수차례 존재했던 무력 도발들은 지울 수 없는 적개심을 서로의 몸에 아로새겼다. 우리 사회에는 북한 정권이 연기하는 연극의 막이 어서 내리길 바라는 이들이 대다수다. 이 책의 저자들도 권력의 시간적 한계에 대해 정치적 예술을 통해 오만하게 저항하는 것이 결국에는 그 자체의 위엄을 붕괴할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저자들은 북한에게 극장국가로서 정치적 생명을 끝내는 행동을 추진할 것을 조언하면서 자신들의 글을 마무리한다.

​북한 지배 구조의 정당성과 부패여부를 떠나 그들이 벌이고 있는 정치적 연극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막이 내릴 것’이라는 시각은 과거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90년대 초 공산권 붕괴 때도 그랬고, ‘고난의 행군’ 때도 그랬다. 김정일 사후에도 북한 정권의 붕괴 가능성은 공공연히 점쳐졌다. 그러나 북한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여전히 막은 내려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관객의 입장에서 막이 내리길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장막 뒤에 숨은 연출가의 의도를 낱낱이 파헤쳐 무대 위에 선 이들에게 목청껏 외쳐야 하는 것 아닐까.

​ 영원히 지속되는 연극은 없다 그러나

북한을 어떻게 보는 입장이든, ‘극장국가 북한’은 북한 권력의 세습 구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특수한 정치문화를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문화적 도구를 통해 어떻게 카리스마 권력이 영속화되는지에 대한 경험적인 연구는 흥미롭다. 그러나 여타 연구와 다를 바 없는 결론 부분은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물론 저자의 입장도 십분 이해가 가지만, 한편으로는 연구의 결론이 결국 북한이 벌이는 정치기술의 한계성으로 귀결된 것과 북한 혁명을 내부적으로 추동할 ‘용기’를 가지라는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담론으로 끝맺음한 것이 아쉽다.​

권력 역사 상 영원히 지속된 연극은 없었다. 극장의 막은 언젠가 내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막이 내려질 시점을 누구도 알 수 없다면, 수동적이고 제3자적 접근이 아닌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북한은 무너질 것, 혹은 무너져야할 것’이라는 연역적 대전제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곧이 바라보는, 바로 그것 말이다.

2015년 4월

크리스
@yoorak_coffee_roas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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