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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락yoorak의 가오픈 첫날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처참한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그것은, 실로 잔혹했습니다.
하루 온종일 가게 문을 두드린 손님이라고는 단 두 테이블. 그것도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첫 손님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럴만도 했습니다. 대구시민 230만명 중 단 1명의 이름도 모르면서, "할아버지 이름으로 뭐라도 만들겠다"며 서울에서 무작정 내려와, 아무런 네트워크 없이 '장사'를 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자해나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흔한 개업 화분 하나 없었고, "오픈"이라는 희망찬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삭막함과 고요함만 그득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나마 대구에서 친해진 G마저 이날은 가게를 찾지 않았습니다. 막노동도 마다않고 공사를 돕던 G는 "형이 그렇게 고생했는데 왠지 파리만 날릴 거 같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가 괴로울 거 같다." 말하고는 몇 주 정도 지나서야 가게를 찾았습니다. 즉, 한 사람만 빼고 모두가 결말을 알고 있었던 셈입니다.
백남준이 생각났습니다. 정확하게는 어떤 장면입니다.
백남준은 1956년 독일로 이주해 본격적인 예술 활동을 시작합니다. 24살 때였습니다. 독일은 지금도 유별난 인종차별로 유명한 나라입니다. 하물며 그때는 어땠을까요? 듣도 보도 못한 나라의, 왜소한 체구의 동양인 남성이 받았을 시선과 대우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일은 이방인이자 마이너리티였던 백남준에게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다집니다. 그는 이곳에서 여러 퍼포먼스를 선보이는데, 그중 하나가 <산책을 위한 선(zen)>입니다. 바이올린 헤드에 목줄을 매달고 뒷짐을 쥔 채 사람들 시선은 아랑곳 않고 독일 도심을 보란듯 누비는 그의 모습은, 지금 언어로 표현하면 "리얼 힙합" 그 자체였습니다. 그후 이어지는 그의 파격적인 퍼포먼스들은 경멸을 호기심으로, 호기심을 리스펙으로 바꾸는 계기가 됩니다.
비주류非主流가 열세인 상황을 뒤집는 것은 결국 "납득이 가는 퍼포먼스"밖에 없습니다. 그 이면에는 '용기'가 있을 겁니다. 물론 백남준과 유락을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주어진 여건도, 상황도 다릅니다. 그럼에도 그 옛날 낯선 도시를 거닐던 어린 아티스트의 용기있는 모습이 문득 떠올랐고, '그래 뭐, 이제 시작인데 일희일비하지 말고 원래 하려던 대로 계속 밀고가보자' 하며 흔들림을 다잡을 수 있었습니다.
"비주류"를 주제로 틈틈이 이런저런 글을 써보려 합니다. 꼭 유락이 ̶아̶싸̶ ̶ ̶비주류라서만은 아닙니다. 유락이 지향하는 곳이 일반적인 시선에서 보았을 때 틀림없는 비주류이겠지만, 왜 그곳이 가치있는지 한번쯤 얘기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