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락에는 왜 불상과 TV가 많을까요?
2024.05.27  ·   by 크리스

유락을 준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육체적인 피로도, 정신적인 괴로움도, 외로움도 아니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건 '중심'을 잡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투르다보니 누군가 이렇게 말하면 이게 맞는 것 같고, 저렇게 말하면 저게 맞는 것 같았습니다.

중간중간 길을 잃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중심을 잡아줬던 것이 바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과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TV부처'였습니다.

'TV부처'는 정면을 비추는 캠코더가 연결된 TV 앞에 돌부처상을 놓아 부처가 브라운관으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는, 누구나 직관적으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몹시 단순한 구도를 가진 작품입니다.

이 단순한 작품이 보는 이로 하여금 상념에 빠지게 하고 묘한 느낌을 받게 하는 까닭은, 서로 상반되는 무언가들을 한 공간에 배치함으로써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들어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가 (1970년대 당시) 세상에서 가장 현대적인 오브제를 통해 스스로의 얼굴을 직시하는 장면, 돌이라는 가장 오래된 물성이 디지털 신호로 전환되어 가장 최첨단인 브라운관으로 송출된다는 내러티브는 어떤 면에선 시공간을 초월하는 느낌마저 받게 합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대단한 점 중 하나는 '새로움'이란 가치를 위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억지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돌부처상과 캠코더, 브라운관TV 등은 모두 이미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의도와 전략을 가지고 '재배치'함으로써 전혀 다른 의미를 창조해낸 셈입니다.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조급함에 길을 잃을 때마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려 하지 말자"고 되뇌었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어떻게 잘 조합하고 배치할 지에 대해서만 고민하자, 거기서 어떤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들 수 있을지만 고민하자, 고 생각했습니다.

유락에 3D 프린터로 만든 부처와 브라운관TV가 곳곳에 포진해 있는 이유입니다. 말하자면 유락이라는 공간이 어떤 의도와 기획 위에서 만들어졌는지를 상징하는 오브제들인 셈입니다.

이 오브제들이 저에게 주는 감각과 영감이 유락을 찾는 분들께도 전달될 수 있길 바랄 따름입니다.

크리스
@yoorak_coffee_roas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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