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2024.12.29  ·   by 크리스

이 글은 왜 시즌 메뉴라며 내놓은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이샤'를 "혁명革命"이라고 이름 붙였는지에 관한 글입니다.(인내심이 필요한 글일 겁니다..미리 죄송합니다)

우선, "실존"에서부터(?) 출발하겠습니다. 실존이란 무엇일까요? 네, 지난번 글에서 저는 '세상에 원래 그런 건 없다는 태도'라고 주장했습니다.(<한 번 알아두면 평생 유식해보일 수 있는 단어를 하나 소개합니다.> 6월30일자 게시글 참고)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존은 '돌멩이를 힘껏 걷어차는 것'입니다.

이럴 때가 있었을 겁니다. 길을 걷다 작고 하찮은 돌부리에 걸려 꽈당, 하고 넘어졌을 때. 어이가 없기도, 분노가 치밀기도 할 겁니다. 그러면 이 돌멩이는, 그 순간부터 그냥 돌멩이가 아니게 됩니다. 어려운 말로는 즉자에서 대자화된 존재로, 쉽게 얘기하면 내 의식에 부지불식간 들어온 아주 성가신 존재가 됩니다. 그때부터 이 보잘것없는 돌멩이와 나 사이에는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긴장관계가 형성됩니다.

이럴 때 우리 앞엔 여러 선택지가 있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아, 뭐야! 이 돌멩이!!!!" 하며 돌멩이를 힘껏 걷어찰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걷어차는 것이 분노 조절 실패에 따른 결과라면 얘기가 달라질 테지만, 팽팽한 긴장관계를 인지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걷어참'이라는 행위를 선택했다면, 설령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세상 무의미한 행위처럼 보일지라도 스스로에겐 실존적 행위가 됩니다.

.......네, 어렵습니다. 이 설명은 대학 시절 은사님인 K교수님께 들은 겁니다. 지금도 정확하게 이해한 것 같진 않습니다만(제대로 기억하고 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때부터 '실존'이란 단어를 들으면 자동적으로 돌멩이를 힘껏 걷어차는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이 커피를 혁명이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모든 것에 의미를 더하겠다는 유락yoorak의 모토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K교수님의 전공은 사회학. 그중에서도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주창한 '성찰 사회학'을 했습니다. 실제로 부르디외의 제자(!!!)입니다. 이쪽 분야에 관심이 없다면 부르디외란 이름이 굉장히 낯설 겁니다. 이분 이론의 핵심은, '신분제가 사라진 지금도 계급은 엄연히 존재하며, 문화자본의 세습을 통해 권력이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 어렵습니다. 결론만 얘기하겠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커피 같은 기호품 역시 어떤 면에선 권력 재생산의 도구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값비싸기로 유명한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이샤'는 더 이상 커피가 아니며, 계급을 구분짓는 문화자본인 셈입니다. 이런 은폐된 구조를 적어도 이 커피를 마시며 한번쯤 곱씹어보자, 생각해보자, 환기해보자, 하는 것이 이 메뉴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여기에는 소수만 누리고 소유하는 문화자본을 누구나 누릴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지금 시대의 혁명 아니겠느냐, 하는 개인적인 생각도 담겨있습니다.

......네, 말이 길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실 "혁명"이란 이름은 낭만젊음사랑에서 베껴온 겁니다. 부러웠습니다. 커피 메뉴를 "낭만", "젊음", "사랑" 두 글자 단어로 팔고 손님들이 "낭만 한 잔 주세요!" "사랑 하나 주세요!" 하는 걸 보고 내심 '이거 꽤 근사한데?' 생각했고, 기회를 틈타 냅다 가져온 겁니다. 이제 볶아 놓은 게이샤 원두가 거의 떨어져(...??) 많이 민망합니다만..한번쯤 이 커피를 왜 이렇게 저렴하게 파는 것인지, 왜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인지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돌멩이를 걷어차는 행위입니다. 밖에서 보면 '왜 저런 짓을.. 어리석은..' 비웃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저한테는 제가 가진 문제의식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소하려는 실존적 시도입니다. 제가 보는 세상은 이렇습니다. 이 커피를 마시며 여러분의 머리에도 돌멩이가 떠오르길 바랍니다.

크리스
@yoorak_coffee_roasters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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